책 1억번 읽은 '조선의 둔재'..세종도 무릎 꿇은 '독서왕'이 됐다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최근 충북 증평군에서 색다른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독서왕김득신문학관’이 준비한 ‘느리지만 끝내 이루었던 길 독서왕 김득신’ 특별전인데요. 김득신의 유물인 <백곡집>과 <임인증광별시방목>이 충북도지정문화재가 된 것을 기념해서 7월11일까지 열립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김득신은 ‘야묘도추’ 등을 그린 풍속화가 김득신(1754~1822)이 아닙니다. 그 분과 동명이인이자 조선 중기의 시인인 백곡 김득신(1604~1684)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백곡 김득신은 천하의 책벌레로 알려진 세종대왕(재위 1418~1450)도 울고 갈 지독한 독서왕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더욱이 김득신은 어려서부터 둔재로 소문났던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세종을 능가하는’ 독서왕이 됐을까요.
■세종의 ‘자뻑’…나보다 책 좋아하는 사람 나와봐
먼저 세종대왕을 알아볼까요. 세종의 독서열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책을 100번씩 반복해서 읽는 것은 기본이었구요. <좌전>과 <초사> 같은 책들은 200번 읽었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도 독서에 몰입하니 하루는 아버지 태종(1400~1418)이 환관을 시켜 책을 다 거두어갔답니다. 그러나 환관의 실수로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식의 편지 모음집)>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 책을 1100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 등)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나보다 책 많이 읽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고 자화자찬했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자뻑’이나요. 그것도 정사인 <세종실록>에 버젓이 등장하는데요. 즉 1423년(세종 5년) 경연(임금에게 유학 경전을 강론하는 일)에 나선 세종이 남송 주희(1130~1200)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을 강독한 뒤 “내가 그 어렵다는 <통감강목>을 20~30번을 읽었다”면서 은근슬쩍 자랑합니다. <통감강목>은 북송 사마광(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을 주희가 공자가 지은 <춘추>의 체제에 따라 재편찬한 역사서인데요.
하지만 편수가 너무 많고 난삽해서 전체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엄청 어려웠지만 나는 그래도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읽었는데 자네들은 읽어봤냐”는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사람 얼굴 이름 외우기 천재인 세종
세종은 독서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자랑했는데요. 예를 들면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는가. 없지 않은가.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거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말야. 책을 본 뒤에 잊어버리는 것이 없었어!”라고 한껏 자랑합니다. 이 대목에서 <세종실록>의 필자는 세종의 비범함에 강조점을 찍습니다.
“임금이 한번 읽은 서적을 기억해내는 재주만 있는게 아니다.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은 물론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게야!’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한다.”
세종의 끊임없는 ‘자뻑’ 내용을 알고싶다면 <세종실록> 1423년 12월23일자를 읽어보십시요.
■<사기> ‘백이·숙제 열전’은 1억번 이상 읽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다독’하면 천하의 세종대왕도 무릎을 꿇을만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백곡 김득신입니다. 김득신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1554~1592)장군의 손자인데요. 먼저 김득신 본인이 평생 읽은 책을 기록한 ‘독수기(讀數記)’를 볼까요.
“<사기> ‘백이전’은 1억1만1000번, ‘능허대기’는 2만500번, ‘노자전’ ‘분왕’ ‘벽력금’ 등은 2만번, ‘제책’ ‘귀신장’…등은 1만8000번 등 모두 37편….”(<백곡집>)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기> 중 ‘열전·백이열전’ 편을 1억번 이상 읽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1만4000번 이상 읽은 책의 편수가 36편이랍니다. 무엇보다 “읽은 회수가 1만번이 넘지 않은 <장자>와 <사기>, <대학> 등은 기록에서 뺀다”고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1만번 이상 읽지 않은 책은 ‘읽은 축’에도 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지었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에이 거짓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책을 억만번 읽었을까요. 맞습니다. 예전의 억(億)은 ‘많은 수’ 혹은 지금의 10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김득신은 <사기> ‘백이열전’을 11만3000번 읽었다는 얘기죠.
■1억번 이상 읽은 책도 기억못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세종과 달리 조선 최고의 독서왕 김득신은 손꼽히는 둔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머리가 아둔해졌다는 겁니다. ‘노둔한(미련하고 둔한)’ 김득신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단적인 예로 김득신은 머리가 나빠 그렇게 1억번 이상 읽은 책을 제대로 외우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김득신은 1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깨우쳤는데요. 그 때 배운 <십구사략>의 첫단락은 겨우 26자에 불과했는데요. 그런데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답니다.
홍한주(1798~1866)의 <지수염필>이 전하는 김득신과 관련된 ‘웃픈’ 사연이 하나 있네요.
김득신이 말을 타고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읽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글귀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그러자 김득신의 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씩 웃으며 말했답니다.
“아니 저 글귀는 ‘부학자 재적극박’(夫學者 載籍極博·무릇 학식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어쩌구 하는 말이잖아요.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글귀잖아요. 저도 (지겹도록 들어서) 외었는데 나으리만 모르겠다는 겁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자신이 1억1만1000번(실제로는 11만1000번) 읽었다는 <사기> ‘백이열전’의 글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김득신=둔재’ 일화가 정사인 <숙종실록>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움직일 수 없는 ‘팩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년) 10월9일자는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지만 사람됨이 오활(세상물정에 어두운)해서 쓰임받지 못했다”는 인물평이 나옵니다.
순암 안정복(1712~1791) 역시 <순암집>에서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했지만(性糊塗魯質)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득신을 향한 평가는 ‘나쁜 머리에도 들입다 책만 파는’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비록 세인들의 평가에 비아냥이 섞이긴 했어도 책읽기와 시짓기를 향한 김득신의 열정과 집념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김득신은 글을 수만번, 십수만번을 읽으면서 글의 맥락이 담긴 부분에는 밀줄 쫙, 둥근 점을 잇대어 놓았고, 핵심의미가 있는 곳에는 흘려쓴 글씨로 각주를 달았다고 합니다.
시를 지을 때는 턱수염을 배배 꼬고, 괴롭게 읊조리는 버릇이 있었답니다. 한번은 아내가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는 양념장은 올리지 않았는데, 김득신은 그냥 싱거운 상추쌈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싱겁지 않냐”고 묻자 “응 잊어버렸어!”라 ‘쿨’하게 대꾸했답니다.(하겸진(1870~1946)의 <동시화>)
■59세에 ‘과거급제’
그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김득신에게 제격인 속담 같습니다.
“책 1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가 어린 듯(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하며, “글을 1000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두소릉시집>)는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언급 그대로였으니까요. 당시 효종(재위 1649~59)은 김득신의 시를 “당나라 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김득신을 ‘멍청한 둔재’라 평한 안정복도 “밤낮으로 책을 읽은 김득신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박세당(1629~1703) 역시 김득신의 치열한 삶을 상찬하는데요.
“공은 시 한 자를 짓는데 1000번이나 단련했다. 시짓는 일에 골몰하면…타고 가던 조랑말이…나아가지 못했다”(<백곡집> ‘서’)고 상찬했습니다.
이렇게 노력한 끝에 김득신은 경치를 묘사할 때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의 그림)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구요. 정두경(1597~1673)·임유후(1601~1673)·홍석기(1606~1680)·권항(1575~?)·김진표(1614~1671)·이일상(1612~1666)·홍만종(1643~1725) 등과 함께 17세기 시단을 이끌었답니다.
그럼에도 김득신은 과거 급제의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5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가 아둔하여 어머니께 불효를 저질렀다”면서 계속 과거에 도전했는데요. 급기야 59살이 된 1661년(현종 2년) 문과 증광시에 당당히 합격했답니다. 지금으로 치면 59살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까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김득신이 자신의 묘비에 남긴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재주가 부족하거든 한가지에 정성을 쏟으라. 이것저것해서 이름이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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