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뚫은 55년차 배우 "다른 배우보다 운이 좋았을 뿐"

백승찬 기자 2021. 4. 2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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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의미와 연기 인생

[경향신문]

시상자 브래드 피트와 함께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씨(왼쪽)와 시상자로 나선 배우 브래드 피트가 시상식 직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아시아인으로는 두 번째 받아…역대 세 번째 고령 수상
김기영 감독 ‘화녀’로 데뷔…개성 있고 다채로운 연기

배우 윤여정씨가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것은 ‘예견된 이변’에 가까웠다. 영화 <미나리>가 지난해부터 미국 내 각종 시상식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윤씨의 연기도 아울러 호평받았기 때문이다. 윤씨는 미국 배우조합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을 높여왔다.

■한국 영화배우 첫 후보 지명·수상

지금까지 한국 배우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로도 지명된 적이 없다. 지난해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등 아카데미 4개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배우들은 연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강수연(베니스영화제)·전도연(칸영화제)·김민희(베를린영화제)씨 등이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적은 있지만, 아카데미는 미국 내 개봉 영화에 한정하는 지역 시상식인 만큼 한국 배우가 지명되기 어려웠다.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자들도 할리우드의 톱스타, 영국 연기파 배우 일색이었다.

몇 해 전부터 아카데미의 백인 편향성을 지적하는 비판이 일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색인종 배우가 후보에 지명되는 일이 잦아졌다. <기생충>의 수상도 이 같은 맥락에서 가능했다.

영어 대화가 가능한 윤씨는 각종 시상식에서 재치있는 수상 소감을 말하며 현지인들의 호감도를 높여왔다. <미나리> 속에서는 전통적인 ‘한국 할머니’를 연기했지만, 현실에선 미국 내 아시아인 혐오범죄를 지적하는 등 동시대 이슈를 놓치지 않았다.

이날도 윤씨는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시상식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글렌 클로스를 이길 수 있겠냐”며 “다른 배우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74세인 윤씨는 77세에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페기 애슈크로프트(<인도로 가는 길>), 74세에 수상한 조지핀 헐(<하비>)에 이어 역대 세 번째 고령 수상자로 기록됐다.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1958년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우메키 미요시 이후 두 번째 연기상 수상자다.

■‘작가 감독’들과 함께한 배우

윤씨는 연기경력 55년의 배우지만, 영화 출연은 상대적으로 과작이었다. 데뷔작은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였다. 단란한 중산층 가정을 파괴하는 하녀 역할이었다. 20대 초반 신인 배우였던 윤씨는 한국 영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장과 함께 영화를 시작한 것이다. 윤씨는 이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에서도 고 김기영 감독에게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결혼과 함께 도미한 윤씨는 귀국 후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딸이 인신매매단에 납치됐다가 돌아온 뒤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자, 범인에게 갖가지 잔혹한 수단으로 직접 복수하는 어머니 역을 맡았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은 “윤여정씨는 이 영화에서 건조하면서도 특별한 연기를 한다”며 “잊혀졌지만 재발굴돼야 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1980~1990년대 주로 TV 드라마에 출연했던 그는 2000년대 들어 다시 영화 출연을 병행했다. 2003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영화배우 윤여정’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 작품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알코올중독에 빠져있던 남편이 죽자마자 사귀던 남자친구와 재혼을 선언한다.

윤씨는 <하하하>(2010), <다른 나라에서>(2011), <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등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

윤씨의 연기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다. 그는 이 영화에서 탑골공원의 ‘박카스 아줌마’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햄버거 가게 직원이 “계산 도와드리겠다”고 말하자, 윤씨가 “돈 내줄 것도 아닌데, 도와주긴 뭘 도와주냐”고 혼잣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재용 감독은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윤여정씨의 실제 말투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정종화 팀장은 “윤여정씨는 안일한 캐릭터 해석에 머물지 않고 늘 새롭게 도전한다”며 “신뢰 가는 감독이 그동안 없었던 이야기를 한다면 이런저런 조건을 재지 않고 출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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