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여정, 겸손한 여정, 속깊은 여정

서정민 2021. 4. 2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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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한국 배우 첫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5일 저녁(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93회 아카데미영화제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기자회견장에서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저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5명 후보 모두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 있는 건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면서도 속 깊은 수상 소감이었다.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를 안는 새 역사를 썼으면서도 윤여정(74)은 다른 후보들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고 자신을 낮췄다.

배우 윤여정은 25일(현지시각) 코로나19로 인해 처음으로 극장 무대를 벗어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건 한국 영화 102년 역사상 처음이다. 아시아 배우로는 역대 두번째로, 1958년 제3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사요나라>(1957)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우메키 미요시 이후 63년 만이다.

그는 이날도 특유의 재치 있는 수상 소감으로 전세계인에게 웃음과 생각할 거리를 안겼다. 먼저 그는 시상자로 나선, <미나리>의 제작자이자 세계적인 배우인 브래드 핏에게 인사를 건네며 말문을 열었다. “브래드 핏, 드디어 우리 만났네요. 털사에서 우리가 촬영할 땐 어디 계셨던 거예요? 만나서 정말 영광이에요.”

이어 외국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한다는 점을 유머로 활용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한국에서 왔고 제 이름은 윤여정입니다. 서양사람 대부분은 저를 ‘여영’이나 ‘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지만 오늘만큼은 여러분 모두를 용서하겠어요.”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는 자신에게 투표한 아카데미 회원들과 <미나리>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특별한 이들을 더 언급했다. 바로 그의 두 아들이었다.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를 일하게 만든 아이들이요.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

1970년대 초반 한창 인기를 누리던 윤여정은 갑자기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가정 생활에만 집중하다 1980년대 중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이혼 뒤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잇기 위해서였다. 당시 닥치는 대로 생계형 연기를 한 것이 오늘에 이르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을 아들에 대한 얘기로 에두른 것이다.

영화 <화녀>(1971)로 자신을 스크린으로 이끈 고 김기영 감독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전했다. “저는 이 상을 저의 첫번째 감독님, 김기영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 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 길지 않은 수상 소감에 자신의 연기인생과 삶의 철학을 압축했다.

아시아 여성 영화인의 성취는 윤여정에서 클로이 자오로 이어졌다. 이날 시상식의 또 다른 주인공은 <노매드랜드>였다.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클로이 자오), 여우주연상(프랜시스 맥도먼드)까지 3관왕에 올랐다.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는 여성으로선 2010년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 이후 역대 두번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아시아 여성 감독으로는 최초다.

지난해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던 봉준호 감독이 이날 감독상 시상자로 나서 눈길을 끌었다. 봉 감독과 지난해 통역사로 화제를 모았던 샤론 최(최성재)는 현지 시상식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서울의 한 극장에서 촬영한 영상으로 시상을 진행했다. 봉 감독이 한국말로 얘기하면 샤론 최가 옆에서 통역하는 방식이었다. 봉 감독은 “다섯 후보에게 ‘감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다”며 그들에게서 전해 들은 답변을 한국말로 소개하기도 했다.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앤서니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올해 84살로 역대 최고령 남우주연상 수상자다. 남우조연상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대니얼 컬루야가 차지했다. 미국 흑인 인권을 대변하는 흑표당의 실존 인물을 연기한 그는 수상 소감에서 “흑인 공동체의 단합의 힘, 연합의 힘을 배웠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저는 다시 일하러 떠나겠다”고 말했다.

이날 연기상 4개 중 절반을 백인이 아닌 배우(윤여정, 대니얼 컬루야)가 받았다. 지난해 4개 모두 백인 배우가 받은 데 견주면 눈에 띄는 변화다. 지난해 <기생충>이 주요 부문 트로피를 휩쓴 데 이어, 올해 클로이 자오 감독과 윤여정이 수상했다는 점도 연이은 아시아 영화인들의 약진이라는 측면에서 눈에 띈다.

윤여정은 이와 관련해 시상식 직후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흑인·황인종으로 나누고,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며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지닌 평등한 사람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신의 수상을 개인 또는 국가적 영예에만 가두지 않고, 범인류적인 메시지로 확장한 셈이다.

오승훈 김효실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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