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은 '미나리' 이전부터 오스카를 예고했다"

2021. 4. 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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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 평론가의 '윤여정論'
윤여정은 톱스타 수식 넘어선
안주하지 않는 진정한 배우
'미나리' 이전 '하녀' '돈의 맛'
'죽여주는 여자'로 경계 넘나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윤여정은 과연 어떤 배우였을까? 김혜자·전도연·최불암·송강호처럼 대한민국 최강의 연기파 배우였을까. 아니면 김지미·전지현·신성일·이병헌 같은 톱스타였을까. 국내외적으로 온갖 상찬들이 '여걸'을 향해 쇄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렇다"고 답할 순 없다. 21세기로 시선을 고정하면, 그녀는 톱스타는커녕 스타로 예우받은 적이 거의 없다. 주연보다는 명품 조연 정도로, 으레 주변부에 머물러왔다.

하지만 그 이름 앞에 "늘 도전하고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단서를 달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어미'(박철수·1985)로 복귀하기 전까지, 1974년 조영남과의 결혼 이후 10여 년간 거쳤던 미국 생활로 인한 '경력 단절'을 고려하면 연기자로서 윤여정의 위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영화 제작 100주년이었던 2019년. 모 일간지 연재 기획 '전찬일 강유정의 한국영화 100년의 얼굴'에서 총 12명의 여배우에 그녀를 포함시켰던 건 그래서였다. 강유정 영화평론가이자 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당시 "윤여정의 인물들은 평이한 성격을 찾기 어렵다"면서 "시대적 욕망을 품은 대체불가의 연기로 윤여정이라는 장르를 구축했다"고 평했다.

실로 그랬다. 작품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욕망의 극한 지점까지 가는 인물을 묘사했다. 충격의 데뷔작 '화녀'(1971)와 '충녀'(김기영·1972)의 명자, '어미'의 홍여사, '하녀'(임상수·2010)의 병식, '돈의 맛'(임상수· 2012)의 백금옥, '죽여주는 여자'(이재용·2016)의 소영이다. 윤여정은 욕망이라는 무정형의 감정 덩어리를 구체적 인물 안에 인격화해 드러냈다. 한결같은그녀만의 태도·스타일이었다. 강 평론가는 "윤여정이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인간적 깊이 때문일 것이다. 결국 연기란 다양한 삶의 순간과 면모들을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 눈빛을 통해 분광하는 작업이다. 윤여정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한국 영화사는 귀중한 인간학 하나를 완성하는 중이다." 한 배우, 아니 한 인간에게 이보다 더 숭고한 찬사가 가능할까.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혔듯, 나는 '미나리'에서 윤여정 연기를 최고로 진단하질 않는다. 객관적 기준으로는,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증명했다. 그 문제적 시니어 영화에서 윤여정은 65세의 박카스 할머니(성매매 노년 여성) 분해 그야말로 '죽여준다'. '윤며드는' 연기에 초점을 맞추면, '미나리'의 순자는 '죽여주는 여자' 소영에 비견되기 무리다.

'꽃피는 봄이 오면'(류장하·2004)과 '장수상회'(강제규·2015)에서 연기도 '미나리'보다 한층 더 높이 평가한다. 강렬한 맛은 다소 부족해도 전자는 내게는 가장 이상적인 모성으로 다가섰으며, 후자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소녀 같은 이미지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

윤여정의 전작(全作) 중 내 최애작은 '화녀'다. 한국 영화사 으뜸 괴물이었던 김기영의 걸작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괴작이다. '화녀'는 2006년과 2014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과, '2019 한겨레 선정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에 선정될 만큼, 이 땅의 영화 전문가들로부터 폭넓은 성원을 받았다. 마침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영화가 특별전 '그녀의 시작과 현재'를 통해 5월 1일 재개봉된다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윤여정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강추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도 언제든지 관람할 순 있으나, 어찌 그 감흥을 대형 스크린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그 문제의 영화를 나는 초등학교 적 청량리 소재 동일극장에서, 때마침 나왔던 단속을 피해 가면서 관람했다. 야할 대로 야했던 극장 간판의 윤여정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장차 영화평론의 길로 인도할 인생 영화로 중학교 적 동네 3류 극장에서 봤던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을 들곤 했으나, 어쩌면 그 이전에 '화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심상에 자리 잡고는, 50여 년간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화녀 윤여정 덕분이었다.

오늘날 눈으로 내러티브에 집중해 본다면, '화녀'는 어색하다 못해 억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김기영은 이야기의 논리적 개연성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 누구도 흉내 내기 쉽지 않은 그만의 개성적 미장센·인물해석·연기 연출로 한국 영화역사를 빛낸 거장 중 거장이다. 2000년대 어느 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하녀'를 보고 나오면서 감독 박찬욱은 말했다. "한국영화는 '하녀' 이후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그의 탄성을 잊지 못한다. 장르가 된 감독 봉준호가 알프레드 히치콕과 더불어 자신의 영화 인생을 결정지은 단 한 명의 감독으로 김기영을 꼽는 것도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다. 나 또한 최근 '기생충'으로 전격 바꾸기 전까지, 한국영화 베스트로 '하녀'를 내세워왔다.

윤여정의 연기에만 시선을 던지면, '화녀'는 '하녀'를 보란 듯 제압한다. '화녀'의 열연이, '하녀' 캐릭터와 연기(이은심)를 압도하기 때문. 이번 기회에 확인해보시라. 윤여정은 말로 형용이 불가능한, 발견·발군의 연기력을 뽐낸다. '화녀'는 개봉 당시 서울 기준 21만4000명에 가까운, 당시로는 '대박'을 터트렸다.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던 감독을 재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 성공의 일등공신이 윤여정이었음은 물론이다. 오죽하면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차를 두고, 자칫 아류작으로 비칠 수도 있을 '충녀'를 만들어 선보였겠는가.

윤여정은 '화녀'로 1971년에 제10회 대종상 신인상을 비롯해 제8회 청룡영화상과 제4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1972년에는 제15회 부일영화상 우수신인상을 거머쥐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 제정·수여되기 9년 전이었다. 당시 국내 영화상을 싹쓸이한 것이다. 결국 윤여정의 기념비적 성과는 이미 예고됐던 셈이다. 윤여정의 소감이 말해주듯,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견디고 또 견디면서.

▶▶ He is…

1961년 서울 태생. 서울대 독문과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간지에서 2년간 기자로 일하다 1993년 로만 폴란스키의 '비터 문' 비평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영화 평론가 길을 걸었다. 2009~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와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 아시아 필름 마켓 부위원장, 연구소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크리튜버 전찬일TV'를 운영하고 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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