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文, 국민과 법치에 선전포고할 건가
이현종 논설위원
4년 동안 내 편 네 편 나누기만
차기 총장 자격도 ‘국정철학’
이성윤 임명 위한 사전 포석
거짓말 대법원장에 病暇 판사
사법부 신뢰 땅바닥에 떨어져
民心경고 무시하면 심판당해
지난해 7월 국회 법사위에서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와 관련한 감사원 감사를 둘러싸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최재형 감사원장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감사원은 국회가 감사를 요청함에 따라 원전 폐쇄의 절차상 문제를 감사했을 뿐인데 여당은 이를 탈원전 정책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런 합법적인 활동을 놓고도 신동근 민주당 의원은 최 원장을 향해 “대통령 국정 운영 철학과 맞지 않으면 감사원장을 사퇴하라”고 몰아붙였다.
문재인 정권은 인사를 할 때마다 “국정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문 대통령 국정 철학이 명문화돼 있지는 않지만, 취임사나 매년 발표하는 신년사를 보면 공정, 정의, 평등, 혁신, 포용, 개혁, 남북 화해 등이다. 이를 제대로 실천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로만 보면 역대 정부가 내세워 온 국정 철학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추상적인 취지에 동의하지 않는 인사가 어디에 있을까. 사실 문 정권 핵심 인사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국정 철학에 부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도 문 정권이 입버릇처럼 국정 철학 운운하는 것은 ‘내 편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을 거창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23일 새 검찰총장 인선 기준에 대해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대한 상관성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이 발언을 듣고 “말 잘 듣는 검찰을 원한다는 걸 장관이 너무 쿨하게 인정해버린 것 같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장관이 생각하는 검찰 개혁이 무엇인지 정말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내각의 장차관을 임명할 때는 모르겠지만, 준사법기관이자 법과 원칙, 공정성이 생명인 검찰총장을 임명하면서 대놓고 국정 철학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무식하거나 아니면 오만하기 짝이 없다.
결국 권력 비리 수사를 뭉개거나 막는 데 혁혁한 공로가 있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차기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이 지검장은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 사건의 핵심 피의자일 뿐 아니라 그간 보여준 처신을 보면 검사 자격조차 없는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조사를 받으면서 이해관계가 있는 검찰 출신 변호사의 차를 이용하질 않나, 몰래 공수처장의 관용차로 조사 같지 않은 ‘황제 조사’를 받았다. 검찰 수장이 되려는 사람이 검찰보다 공수처를 더 신뢰한다면 2000여 검사가 그를 따르겠는가. 만약 문 대통령이 이 지검장을 총장으로 임명한다면 법치 파괴를 공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 정권은 검찰·사법 개혁을 국정철학으로 제시했지만, 그 행태를 보면 ‘권력의 시녀’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거짓말 대법원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법부 권위를 망가뜨렸다. 정권 비리 사건을 챙기기 위해 ‘코드 판사’를 무리하게 연임시키며 맡겼더니 사건 심리와 선고를 앞두고 돌연 ‘병가(病暇)’를 내고 사라지는 블랙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 재판을 받기 전에 판사가 어느 모임 소속인지를 먼저 알아보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문 정권의 ‘정치적 숙원’이라며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공수처는 제대로 출발도 하기 전에 ‘정권 범죄 비호처’라는 오명은 물론, 온갖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심지어 김진욱 공수처장이 검찰에 수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다. 특수 수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변호사 출신 검사들로 권력 범죄를 수사하겠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경찰은 국가수사본부를 거창하게 발족시켰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 투기 수사 실적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의 ‘코드화’는 물론 검찰, 공수처, 경찰 할 것 없이 국가 형사·사법체계가 문 정권 4년 동안 철저히 망가져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전직 검찰총장(윤석열)이 차기 야권의 대선 후보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민심의 결과물이다. 지난 4·7 재·보궐선거에서 분노한 민심을 보고도 문 정권은 반성은커녕 또 국정 철학과 검찰개혁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국민의 58%가 ‘만성적 울분’에 처해 있는 현실을 문 정권이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 후과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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