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보이지 않는 자들이 가득한 사회 / 류영재

한겨레 2021. 4. 2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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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장애인 이동권 등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에 나섰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활동가들이 노역 투쟁을 결의했다. 왼쪽부터 권달주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이형숙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비마이너> 제공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

재판 당사자 중 시각장애인이 있었다. 현장검증은 재판 당사자들과 재판부가 함께 현장에 직접 가서 현황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절차다. 그 당사자에게 현장검증 절차를 설명하고 있자니, 시큰둥하게 말한다. “지금까지 재판도 어떻게 진행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현장엔 가봐야 뭘 해요.” 현장검증을 하게 되면 최대한 많이 설명하며 진행하겠다고 설명하자 겨우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걱정에 빠졌다. 설명은 실컷 해놨지만 정작 시각장애인이 참여하는 현장검증을 진행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현황을 잘 설명하고 질의응답 절차에서 당사자가 배제되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갖추어진 인적 물적 시스템이 없다 보니 한계가 명백했다. 현장검증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점자나 바코드가 첨부된 판결문을 제공하려고 했는데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최근 시각장애인을 위한 판결문 제공 절차에 대한 규칙이 마련되었다). 이런 경험은 간간이 이어졌다. 청각장애 피고인에게 문자통역을 제공하려고 보니 컴퓨터 화면과 연동되는 롤스크린이 그 당사자 뒤쪽으로 내려와서 매우 불편했고 피고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면 연동 컴퓨터를 제공할 수도 없었다. 정신장애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을 할 때 증인의 특성을 반영한 의사소통 체계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판을 하면서 당사자가 겪게 되는 이런저런 장애 상황에 매번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의문이 들었다. 2011년 장애인에 대한 사법지원 매뉴얼을 마련하면서 재판 당사자들이 재판 절차에 참여할 때 장애 상황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고 정리해 놓았는데 왜 10년 내내 인적 물적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았을까. 재판 당사자 중 장애인의 비율이 극히 낮다 보니 설비를 갖추고 전문 인력을 상시 고용할 만큼의 활용도가 나오지 않는다, 효율성이 떨어지다 보니 한정된 예산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등의 쉬운 대답이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이것이리라 짐작한다.

“보이지 않아서.”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 인구 대비 장애를 가진 시민 수의 비율이 결코 낮지 않을 텐데,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인을 쉽게 볼 수 없다. 시설에서 관리되거나 이동이 어려워 외출할 수 없거나 대학이나 직장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으니 인식에서도 지워진다.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비장애인이 눈에 보이는 압도적 다수가 되면서 그들은 ‘정상’이 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은 ‘비정상’이 된다. 사회의 시스템은 ‘정상인’을 기준으로 마련된다. ‘비정상인’의 장애 상황은 예외적인 것이 되고 그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되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호의이자 배려에 불과하게 된다. 예산을 호의와 배려에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따라서 남는 돈이 있을 때나 사용할 수 있다. 즉, 하면 좋겠지만 안 해도 괜찮다. 이런 흐름 속에서 수십년간 시민들은 재판 절차에서 심각한 장애를 겪고 소외되었다. 그 긴 세월 ‘당사자를 소외시키는 재판 절차는 위헌적이고 위법하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조차 제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기에 특별히 장애를 예로 들어봤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민들은 부지기수다. 그중에 비혼·사실혼(동성혼 포함)·이혼·재혼 및 입양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이루고 사는 시민들도 있다. 나는 작년 두 아들을 키우던 남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을 준비할 때 첫째가 이렇게 말했다. “결혼식에 아들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할 거 아녜요. 그러니까 결혼식 때 제가 숨을까요?” 보이지 않는 자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최근 비혼모 가족의 방송 출연을 비토하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오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양(兩)성이 육체적으로 결합하여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형태의 가족만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참된 가족이라는 취지의 주장이 나왔다. 소위 ‘정상가족’ 프레임이 강조되는 양상이다. 우리 가족은 엄마와 아빠가 자녀들을 키우는 형태니까 무관할까. 그렇지 않다. 어떤 기준으로든 삶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자를 만드는 사회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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