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세상]책임을 숨기는 말하기 방식
[경향신문]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법이 있다. ‘누구 책임인가’라고 묻고 답하면 될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들이 있다’고 서술하듯 말하는 식이다. 이런 말하기에 능한 자는 ‘내가 한 약속’이라고 표현해야 할 곳에서 ‘내가 했던 약속이라고 하는 것들’이란 식으로 늘려 말하기를 좋아한다. 구체적인 상태에 ‘하는 것’이란 의존명사를 더해서 추상화한 뒤에 다시 복수를 뜻하는 조사인 ‘들’을 붙여서 구체적인 상태가 복수로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과거 운동권 학생들이 쓰던 말투가 대체로 그랬다고 생각하면 기분 탓이겠지만, 요즘 대학원 석사 과정 학생들이 세미나에서 사용하는 말투도 이렇다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뭔가 중요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 같은데, 실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염려가 담긴 어법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상과 구체를 오가는 사이에 애초에 말하려고 했던 바는 오히려 모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모호함에 혼란을 더하는 표현이 ‘국민들’이다. ‘국민들께 송구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국민들 말이다. 국민이 이미 나라에 속한 개인들을 집합적으로 지칭하는데, 왜 다시 복수형 조사를 덧붙여 국민들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다. 우리 국민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국민들도 함께 지칭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말도 아닐 텐데,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원래 국민이란 단어가 어렵기는 하다. 제6공화국 헌법의 전문에 주어로 등장하는 권력의 주체는 ‘우리 대한국민’인데, 이는 국가 주권을 선언하는 집합체다. 헌법은 또한 국가가 확인하고 보장해야 할 권리의 주체를 ‘모든 국민’이라 부른다. 국민을 구성하는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본권의 담지자라는 의도를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원용해서 말하자면, 일반의지를 형성하는 주권자가 곧 그것에 복종하는 시민권의 주체와 같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민주정의 주체인 피플을 국민이라 번역해서 사용했을 때부터 시작한 혼란도 있다. 당대에 유행했던 용어를 사용해서 ‘인민’이라 했더라면 간단하면서도 편리할 뻔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자를 아우르면서 그저 ‘많은 사람들’이란 뜻으로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즉 당대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곧 단칭의 주권자로 떠오른다는 민주주의 이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을 수도 있다. 사람 ‘인’을 떼고 나라 ‘국’을 더해서 ‘국민’이라고 부르는 순간 어쩐지 나라에 속한 자들만이 권리의 주체인 듯 들리기 시작하는데, 많은 오해가 여기부터 시작했다.
‘민’으로만은 부족한 이유가 별도로 있다. 허신의 <설문해자>를 보면, 고대 중국인은 ‘민(民)’을 ‘중맹(衆萌)’으로 보았는데, 이는 나라가 바뀐 사람들이란 뜻이다. 어째서 나라가 바뀐 사람일까. 후대 갑골문 연구자들은 ‘민’이 예리한 침에 찔린 눈을 그린 것이라고 밝혔으니, 나라가 바뀐 사람들이란 곧 전쟁에 져서 노예로 살기 전에 강제로 시력을 빼앗긴 사람들을 의미한다. 청대 <설문해자> 연구자인 단옥재는 ‘맹’이란 답답하게 잘 모르는 아이들이란 주석을 덧붙였다. 시력도 약하고 말도 잘 안 통하는 노예들이란 곧 답답하고 뭘 모르는 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민’이란 단어를 현대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기어코 따라오는 오래된 냄새가 있다.
나는 정치인이 ‘국민들께 약속합니다’ 또는 ‘국민들께 송구합니다’라고 발언할 때마다 답답해진다. 일단 그들이 호명하는 국민‘들’이 누구인지 혼란스럽다. 나라에 속한 ‘민’에게 존대하는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약속이나 책임의 수행 주체를 밝혀서 특정하지 않는 것도 무책임하게 들린다. 내 권력은 누가 위임한 것인가, 위임받은 권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내가 국민에게 책임지고 응답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숨기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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