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용의 직관]박정희를 초대한 광주비엔날레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2021. 4.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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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광주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13번째다. 세계적 예술축제지만 마냥 흥겹지는 않다. 처음 비엔날레의 문을 연 힘은 5·18이다. 세계 예술과 어울리며 상처가 치유되길 바랐다. 한쪽에선 안티 비엔날레도 열었다. 그래도 세계의 작가들이 광주로 왔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세계에 흩어져 있던 연대의 기억들이 예술작품이 되어 광주에 모인다. 광주비엔날레는 연대의 기억들이 연대를 이루는 전시였다. 곧 세계의 비엔날레로 성장한다. 그러다 광주비엔날레에서 광주가 점점 사라진다. 비엔날레가 광주에 묶여 자폐나 자위에 빠질 것을 염려했을까?

뜻이 옳아도 뿌리까지 자르면 안 된다. 광주는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다. 광주이기에 달려온 작가가 대부분이다. 다행히 지난 회부터 광주와 비엔날레가 들숨과 날숨을 함께 쉬기 시작했다. 광주라는 콘텍스트에 반응하는 ‘장소 특징적 큐레이팅’이 최고의 예술세계를 구성한다.

힘센 작품이 많다. 한 번에 다 볼 수 없다. 작품의 깊이가 긴 시간을 요구한다. 한 작품이라도 제대로 만나야 즐길 수 있다. 못 본 작품이 많아도 된다.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다. 짧은 시간 크게 즐긴 작품들의 이름이다. 아나 마리아 밀란의 ‘행복한 사람들’, 오우티 피에스키의 ‘함께 떠오르기’, 자콜비 새터화이트의 ‘우리가 서로를 다치게 할 때 그곳은 지옥이 된다’, 조현택의 ‘스톤마켓’, 김상돈의 ‘카트’, 이상호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의 심연을 꽤 긴 시간 들여다본다.

포승줄이 채워진 채 예술 법정에
선92명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
전시 중단을 압박하는 박정희재단이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고 기념하려면
대통령기념관에만 가두면 안 된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에는 친일부역자 92명이 등장한다. 모두가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이 채워져 있다. 작가는 1949년 반민특위 해체로 중단된 처벌을 예술 작품 안에서 단행한다. 예술 법정은 중죄인 19명을 중앙에 앉히고 나머지가 주변을 감싸도록 했다. 중앙 상단에는 악질 중에 악질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던 모습이 재현된다. 신비스러운 구름 속에.

만주환상곡을 애국가로 바꾼 안익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방응모와 김성수, 현대문학의 개척자 이광수, 최적의 시어를 창조한 서정주,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 한국 역사학계 일부를 여전히 지휘하는 이병도, 반공 군인의 영웅 백선엽, 그리고 경제부흥을 이끈 최장기 통치자 박정희가 예술 법정에 초대를 받았다.

노덕술을 제외하면 ‘일제를 빛낸 사람들’ 개개인의 구석구석을 아무리 살펴봐도 억지로 법정에 끌려온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나쁜 사람들이라는 느낌도 전혀 없다. 하나같이 반듯하고 단정하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다. 잘 차려입은 일제 군복이 아주 조금 눈에 거슬린다.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면 ‘일제를 빛낸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집단 초상화 같다. 이유가 있다. 작가는 이들의 얼굴을 자신들이 연출해서 찍은 사진에서 가져왔다. 자신들이 가장 뽐내고 싶은 모습을 그대로 남겨준 것이다. 황토색 밑그림이 전체를 규제하고 있어 그림은 매우 따뜻하다. 각자의 얼굴은 조선시대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져 매우 담백하다. 고려불화 양식에 따라 그려진 의습 덕택인지 대부분 자세가 우아하다. 잡혀온 것이 아니라 작가 이상호가 예술 법정에 초대한 것이 분명하다.

초대장이 못마땅했을까?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일제를 빛낸 사람들’의 전시 중단을 압박하고 있다. 이들이 긴 시간 내어 그림을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실제 그림 속에는 서로 모순된 감정이 중첩되어 있다. 준엄한 심판과 인간적 연민, 혹독한 작가정신과 흔들리는 인간 심성이 중화되지 않은 채로 겹쳐 있다.

진정으로 박정희의 고뇌를 이해하고 기념하려면 그를 대통령기념관에 가두면 안 된다. 입체적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애쓴 ‘일제를 빛낸 사람들’ 덕에 박정희는 곧 민족문제연구소 산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포승줄에 묶여 관람객을 맞이할 것이다. 비디오아트의 개척자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 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의 영원한 뮤즈 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도 옆에 있을 것이다.

작가 이상호는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라는 걸개그림 때문에 1987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그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아직도 많이 아프다. 그가 지난 1년 동안 친일부역자들에게 무릎 꿇고 얼굴 마주보며 ‘일제를 빛낸 사람들’을 그렸다. 진심으로 박정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1시간이라도 이 그림 앞에 무릎을 꿇어라. 포승줄은 그렇게 푸는 것이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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