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혼자 산다'가 아직도 특이한가

이명희 전국사회부장 2021. 4. 26.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영화 <소공녀>)

“중년이 되면서 한편으로 또 다른 고민과 걱정거리가 시작되었다. (…) 결정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며 비혼인 내가 지금처럼 불안정 고용 상태로 늙어서까지 자립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책 <비혼 1세대의 탄생>)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자면 어떨까요? 섹스하자는 게 아니고 함께 이 끔찍한 밤을 견뎌보자고요. 긴 밤이 너무 지겹지 않나요?”(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

이명희 전국사회부장

대학을 중퇴한 후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청년 ‘미소’는 담뱃값과 월세가 오르자 집을 포기한다. 위스키 한 잔과 담배를 포기할 수 없어 내린 결정이다. 한 중년 비혼 여성은 혼자 살아가는 것은 두렵다고 고백한다. 남편이 죽은 후 노년을 혼자 보내는 에디는 어느 날 같은 처지인 루이스에게 밤을 함께 보내자고 제안한다.

영화와 책 얘기지만 혼자 살면서 겪는 여러 어려움을 생애 주기별로 나열하고 보니 이들이 마주한 현실이 남의 일만도 아니다. 이건 나에게도 곧 닥칠 문제이다.

1인 가구는 이제 한국에서 가장 주된 가구 유형이 됐다. 전국의 1인 가구 수는 900만가구를 넘어섰고, 전체 가구의 40%에 육박한다. 1인 가구 증가 추세에 정부와 지자체 등은 맞춤형 지원 대책을 내놓고 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4인 가구 기준이던 정책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1인 가구를 위한 정책 종합패키지를 만들라고 주문한 바 있다.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의 ‘1호 공약’이었던 1인 가구 지원을 위해 전담조직 설치에 착수했다. 다음달 시장 직속의 정규조직인 ‘1인 가구 특별대책추진단’을 신설한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1인 가구 대응 정책을 새로 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인 가구 증가는 사회 전방위로 파장이 미치기 때문이다. 그동안 1인 가구 지원 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내놓은 방안 대부분이 무인택배 시스템, 안심문고리 달아주기 등 선심성 정책에 그쳤다는 것이 문제다. 복지 기반이 아직 탄탄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그 돈을 1인 가구를 위한 실질적인 지원에 쓰는 게 맞다.

1인 가구들은 ‘빈곤’과 ‘고립’을 주된 어려움으로 꼽는다. 청년 1인 가구의 약 3분의 1은 수입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쓴다. 그래도 취향을 지켜내느라 집을 포기한 미소는 현실에선 그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돈이 없어 친구 집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나 술 담배 사랑하잖아”라며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 미소의 취향은 현실에 치인 친구에겐 “염치없는 사랑”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미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취향과 개성을 포기하라고. <비혼 1세대의 탄생>에서 중년 비혼 여성들의 삶을 밖으로 꺼내 놓은 홍재희 작가는 결혼제도 밖의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정부 정책은 ‘부부+자녀 가구’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서울시장 후보 시절 1호 공약으로 ‘1인 가구를 위한 주택청약 방안’을 발표했다. 조 의원은 “신혼부부 특별공급, 다자녀 특별공급, 노부모부양 특별공급 등의 제도가 있지만 이는 모두 부양가족이 있어야 한다”며 “심지어 생애최초 특별공급이라는 제도조차도 기혼이거나 자녀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고 1인 가구 역차별 문제를 지적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중 50대 1인 가구라고 밝힌 한 청원인은 이 문제를 들어 정부의 부동산 분양 정책은 ‘포괄적 차별’인 1인 가구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며, 기준 재검토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도 있다. 최근 부모와 같이 살지 않는 20대 청년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별도 가구로 인정해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이 나왔다. 인권위는 보건복지부에 관련 법과 제도를 개선하도록 권고했다.

사회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1인 가구 정책은 1인 가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서울시가 이번에는 1인 가구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차별화된 정책을 내놓기 바란다. 정부의 정책 변화까지 이끌 수 있다면 더 좋다. 돌이켜보면 지금 당연히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도 처음에는 다 논란거리였다. 의무교육, 무상보육, 무상급식 등등…. 당신도 언젠가 혼자가 될 수 있다.

이명희 전국사회부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