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의 폭력에 맞선 시민의 저항·기억을 위한 투쟁..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서로의 '거울'이 되다

백승찬 기자 2021. 4. 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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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는 1980년 광주와 1976~198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교차하는 다큐멘터리다. 5·18 유가족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장면(위 사진)과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하얀 두건을 쓴 아르헨티나 5월 광장의 여성들. 엣나인필름 제공
1980년 한국·1970년대 아르헨
닮은꼴 두 도시 모습 교차시켜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복원

어머니는 얼굴이 훼손된 채 전남도청에 놓인 시신을 목격했다. “이상스럽게 마음이 쓰였다”는 그는 다시 돌아가 아들이 평소 입었던 옷차림을 확인한 뒤에야 말했다. “넌 어째 해필 얼굴 반짝을 잊어부렀냐.” 증언을 듣던 카메라는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로 이동한다. 19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반체제 인사들이 끌려가 갇혔던 해군기술학교 담벼락에는 실종자들의 사진이 즐비하다. 싱그러운 나뭇잎이 사진의 얼굴 반쪽을 가린 장면이 포착된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좋은 빛 좋은 공기>는 1980년 광주와 1976~198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교차하는 다큐멘터리다. 광주가 ‘빛’을 뜻한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좋은 공기’라는 건 흥미로운 우연이다. 시민들의 저항, 군사 정권의 폭력, 수많은 실종과 죽음, 기억을 위한 투쟁이 두 지역에서 면면히 이어진다.

지난 22일 만난 임흥순 감독은 제주4·3을 다룬 <비념> 개봉 이후 관객과의 만남 자리에서 5·18을 다룬 영화에 대한 책무를 느꼈다고 했다. 관객은 “<비념>과 같이 민중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5·18을 담아줄 생각은 없냐”고 물었고, 그 결과가 <좋은 빛 좋은 공기>다. 다만 <비념>이 가족사를 통해 시대의 비극을 들여다본다면,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사건의 전모에 조금 더 직접 다가선다.

임흥순 감독은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복원하는 데 있어 아르헨티나가 앞선 면이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는 “아르헨티나는 복원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진척시키는데, 한국은 정권 바뀌기 전에 하려다보니 생각할 시간 없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피부색 등 모르게 대부분 흑백
끔찍한 사진·상황 재현은 배제
마지막엔 ‘#미얀마와함께’ 자막
“고통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이들
더 좋은 삶 만드는 데 역할 할 것”

이 영화에서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로의 거울이 된다. 2018년 미국의 비엔날레인 카네기 인터내셔널을 위해 함께 작업한 한강 작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 방문을 권했다. 한강 작가 역시 시 ‘거울 저편의 겨울’에서 두 지역을 비교한 적이 있다. 임흥순은 아르헨티나 방문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광주에서 ‘피해자 이상의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국가폭력의 역사를 세심히 기억하고 복원하는 아르헨티나의 모습과 전남도청의 5·18 흔적을 보존하라며 농성을 벌인 5·18 피해자들 모습도 겹쳤다.

임흥순은 기억과 복원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는 아르헨티나가 앞서있다고 봤다. “아르헨티나는 복원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진척시키는데, 한국은 정권 바뀌기 전에 하려다보니 생각할 시간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는 섣부른 복원은 “새 옷을 입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옷을 바꿔 입더라도 사람의 정체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에서다.

임흥순 감독 다큐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 28일 개봉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주로 흑백으로 촬영됐다.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피부색, 특유의 색채 등을 구분할 수 없게 해, 두 지역의 상황을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에서다. 당시 상황을 재현하거나, 끔찍한 사진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증언과 생각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는 몇 개의 챕터로 나뉜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쑥갓’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은 증언의 한 대목에 등장한다. 엄혹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시장이 열렸다. 증언자는 “푸른나물을 쳐다보면서 ‘아 생명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봤던 채소가 쑥갓인데, 지금도 쑥갓을 보면 좋은 느낌이 난다”고 말한다. 흑백으로 이어지던 영화는 이 대목에 이르러 풀과 나무의 초록색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흥순은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오신 분들이 많다”며 “그 바탕 위에서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 마지막에는 ‘#미얀마와함께’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편집 작업을 마무리하려는 시점에 미얀마 쿠데타가 일어났다. 임흥순은 “미얀마의 상황을 보는 광주분들은 역사가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공감하려 한다”고 말했다. <비념>이 해군기지 문제를,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위로공단>이 캄보디아의 여성노동자 착취를 다룬 것과 같은 맥락이다. <좋은 빛 좋은 공기>는 국내에서 미얀마 시민을 지지하는 단체들과 함께하는 상영회도 준비 중이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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