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앞세운 바이든, 터키 눈치 안 보고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규정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2021. 4. 2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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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중요성에 수위조절한 전임들과 달리 "되풀이 안 돼야"
바이든 정부 핵심가치 반영..에르도안 "정치화 의도" 반발

[경향신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사진)은 24일(현지시간) 터키의 전신 오스만제국이 한 세기 전 일으킨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중동 및 러시아 정책에 있어 터키가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해 수위를 조절했던 전임들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은 인권이라는 원칙을 앞세운 것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역사적 논쟁 대상을 정치화했다며 반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 국민은 106년 전 오늘 시작된 집단학살로 목숨을 잃은 모든 아르메니아인을 기린다”고 밝혔다. 집단학살은 인종·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학살로 절멸시키려는 행위를 지칭한다.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하면서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스만제국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당시 주적이었던 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하자 1915년 4월24일 지식인 수백명을 체포해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 추방을 단행했다. 오스만제국에 거주하던 약 2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150만명이 학살되거나, 시리아 사막으로 추방돼 사망했다. 오스만제국을 이은 터키는 조직적인 학살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다뤄야 할 논쟁”이라면서 “제3자가 정치화하거나 터키에 대한 간섭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터키 외교부도 데이비드 새터필드 터키 주재 미국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터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수십개국이 이 사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1981년 이 사건을 집단학살로 규정했지만 이후 대통령들은 매년 이 사건을 추모하면서도 터키와의 관계를 의식해 집단학살이란 표현은 삼갔다.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으로 미국의 동맹이다. 터키 남부 인시를릭 공군기지는 미 공군의 중동·중앙아시아 지역 작전을 위한 중요 거점이다. 미국의 러시아와 이란 견제에 있어서도 터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집단학살로 규정한 배경은 복합적이다. 먼저 인권을 외교 정책의 핵심 가치로 내건 정부의 철학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억압하면서 미국과 터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진 점도 작용했다. 미국의 반대에도 터키가 러시아산 S-400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도입을 강행하자 미국은 지난해 터키 방위산업청에 대한 수출 허가 금지 등 제재를 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은 눈에 띄게 에르도안 대통령과 거리를 두고 있다.

이번 일로 미국과 터키 관계가 더 냉랭해지겠지만 양측 모두 수위를 조절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에서 “우리는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일어난 일이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날 에르도안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성명 취지를 직접 알린 것으로 알려졌다.

미 고위 당국자는 로이터통신에 미국은 터키를 여전히 중요한 나토 동맹으로 간주하며 이번 일로 터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바이든 정부가 에르도안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마찰은 피하면서도 과하게 그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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