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의 강화일기] 썩은 튤립 구근

한겨레 2021. 4. 2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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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의 강화일기]

김금숙의 강화일기

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작년 이른 봄이었다. 우연히 온수리에 갔는데 시장이 섰다. 시장이래 봤자 고무 대야와 종이 상자에 채소 조금 놓고 파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그 사이에 꽃 화분이 일렬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튤립, 제라늄, 라일락, 장미부터 아주 작은 포도나무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때가 아닌데 벌써 핀 노랗고 빨간 튤립이 예뻤다. 춥고 긴 잿빛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반가운 색이었다. 튤립 옆에는 양파와 마늘 사이 정도 되는 크기의 구근이 보였다. 나는 꽃 파는 아저씨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다. 한쪽은 백합이요, 다른 한쪽은 튤립이라고 했다. 튤립 화분보다 구근이 훨씬 쌌다. 나는 백합 구근 몇개와 튤립 구근 몇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 어디가 좋을까? 우리 집 마당은 무언가를 심기에는 좁다. 더구나 전에 살던 집주인이 이미 심어 놓은 꽃나무로 빼곡하다. 아무리 보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때마침 마당 한쪽에 놓여 있는 큰 고무 대야가 눈에 띄었다. 다행히 고무 대야의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게 구멍도 나 있었다. 나는 스티로폼을 오려 구멍 위에 놓고 그 위로 흙을 담기 시작했다. 그곳에 튤립 구근 여섯개를 심었다. 한달쯤 후에 뿌리에서 튤립의 초록 순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튤립이 얼마나 나왔나 보러 가는 게 내 하루 시작의 즐거움이었다. 햇살 받고 잘 자라라고 양지바른 곳으로 대야를 옮겼다. 물도 매일 열심히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튤립은 잘 크지 못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엉겅퀴 언니네도 현숙이 언니네도 상일이네, 영주네, ‘큰 나무’ 카페 튤립도 모두 얼굴을 내밀고 사랑을 고백했다. 오직 우리 집 튤립만 성장을 멈추어버렸다. 봄이 다 가도록 기다렸다. 나의 튤립은 끝끝내 잎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렸다.

올해에는 나오겠지. 아침에 눈을 뜨면 반려견 당근, 감자, 초코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고 튤립을 보러 갔다. 어느 날 초록 순이 땅 밖으로 얼굴을 수줍게 내밀었다. 그 모습이 반갑고 기특했다. 온수리 농협에 장을 보러 갔다. 봉오리가 맺힌 튤립을 싸게 팔고 있었다. 꽃이 빨리 보고 싶어서 급한 마음에 튤립 화분 다섯 개를 샀다. 작년 여름, 마당에 있던 연못을 흙으로 채웠다. 내 손으로 잔디를 심고 돌을 놓아 그곳에 꽃밭을 만들었다. 온수리 농협에서 사 온 튤립을 화분에서 꺼내어 그 꽃밭에 심었다. 꽃은 이틀이 지나자 벌써 피기 시작했다.

새로 사 온 튤립은 하루가 다르게 활짝 열리고 마음껏 자태를 뽐내었다. 붉은 고무 대야에 작년에 심은 튤립도 꽃봉오리가 올라올 때가 되었다. 하지만 날이 가도 이상하게 그대로였다. 잎이 오히려 더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흙이 너무 단단한가 싶어 옮겨심기로 했다. 호미로 튤립 주위의 흙을 살살 긁었다. 꽃삽으로 튤립 구근을 조심스레 팠다. 이게 웬일인가? 썩어 있었다. 손으로 눌러보니 그냥 으깨져 버렸다. 결코 힘을 주어 누른 것이 아니었다. 다른 구근도 파보았다. 분명 여섯개를 심었었는데 아무리 땅을 파보아도 남아 있는 건 세개뿐이었다. 그마저도 다 썩어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썩은 것을 살리겠다고 조심 또 조심 두 손으로 옮겨 꽃밭에 심어주었다.

반 이상이 썩은 튤립 구근을 옮겨 심은 날,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켰다. 튤립이 죽을지 살아남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그날, 뉴스에서는 한 여성을 스토킹하며 괴롭히다가 그녀와 가족까지 살해한 남성의 얼굴을 공개했다. 그는 상대방이 싫다는데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괴롭히며 만나자고 했다. 목숨까지 빼앗는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떤 사회의 분위기와 교육의 결과인가?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성이라면 좁은 골목길을, 밤길을 무서움에 떨며 뒤를, 주위를 살피며 걸어본 경험이 한번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대방이 싫다는데 보내는 문자와 전화가 폭력이 아니라고, 그까짓 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몹시 위험한 생각이다. 잘못되었다. 그것은 폭력이다.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튤립 구근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옮겨 심으려고 흙을 팠을 때는 살짝 만지기만 해도 물러져버렸다. 우리 사회도 튤립의 구근처럼 썩은 것은 아닐까? 얼마만큼 썩은 것일까? 썩었다는 것을 인지할 능력은 있는 것일까? 회복 가능성은 있을까?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을 탓하고 이 사회를 탓하기에 앞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붓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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