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주민들은 왜 78년간 美조종사 유해를 갖고 있었나

정지섭 기자 2021. 4. 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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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뉴기니에서 실종된 미군 파일럿 유해 발견
수차례 발굴 시도 실패..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반환받아

78년. 스물 셋의 나이에 전사한 미군 조종사가 1만3600km 떨어진 고향으로 귀향길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미군 파일럿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남태평양 뉴기니섬 정글에 추락해서 실종됐던 미 육군 항공대 소속 로버트 파커 중위의 유해가 우여곡절 끝에 발견돼 장례식이 치러지게 됐다. 수차례 발굴과 수습이 시도됐지만 번번이 찾는데 실패했던 그의 유해는 추락 지점 근처 마을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유해가 확인된 로버트 파커 미 육군 항공단 중위. 그는 1943년 11월 뉴기니섬 상공에서 적기와 교전을 벌이다 추락해 실종됐었다.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국(DPAA)이 22일(현지 시각) 파커 중위의 유해가 확인됐다고 발표하고 장례 일정과 안장 장소를 추후 공지하겠다고 밝혔다. 미 DPAA의 주업무는 6·25 전쟁을 포함해 2차 대전, 베트남전 등 과거 미국이 참전했던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수습한 뒤 신원을 확인해 고향땅의 유족들에게 보내는 일이다. 지금도 이 과정을 통해 장기 실종자들이 뒤늦게 귀향길에 오르고 있다. 이번에 확인된 파커 중위의 사례는 그 중에서도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미시간주 랜싱 출신의 파커 중위는 미 육군 항공대(미 공군의 전신) 35전투단 8전투 그룹 소속으로 1943년 11월 15일 P-40 워호크 전투기를 몰고 뉴기니섬 동부 마캄 강 계곡 일대를 정찰 비행하다가 적기와 마주치며 교전이 벌어졌다. 뉴기니섬(현재의 파푸아뉴기니독립국과 인도네시아 영토를 모두 포함)은 2차 대전 당시 미국-호주 연합군과 일본군이 맞서 싸웠던 대표적 격전지다.

워커 중위가 몰았던 전투기와 같은 기종인 P-40 워호크. /미 공군 박물관 홈페이지

그는 적기 한대를 격추시켰으나 이후 다른 비행기와 충돌했고 날개가 부러지면서 추락했다. 그는 끝내 구조되지 못한 것으로 보고됐고, 이후 진행된 항공 수색 작업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1944년 11월 실종자로 처리됐고, 당시 미 전쟁부는 잠재적 전사자로 분류했다. 그러나 그의 유해를 찾아 귀환시키려는 노력은 이어졌다. 종전 뒤 미국묘지등록청은 격전지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의 일환으로 그의 비행기가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 대한 수색·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1948년 4월 수색작업이 종료될 때까지도 파커 중위와 그가 몰던 전투기에 대한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파커 중위는 이듬해 9월 14일 유해수습이 불가능한 잠재적 전사자로 분류됐다. 61년이 지난 뒤 파커 중위를 찾으려는 시도가 재개됐다. 제3의 조사팀이 파푸아뉴기니 모로베주에 있는 추락 추정현장을 찾아 현장 조사를 벌였고, P-40 전투기의 꼬리 부분 부속을 찾아냈다.

2차대전 당시 뉴기니 원주민들이 부상당한 미군 병사를 미군 캠프로 호송하고 있다. 당시 연합군은 뉴기니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미 의회 도서관

여기에 적힌 숫자는 파커 중위가 몰던 전투기 숫자와 일치했다. 그러나 유해 발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8년이 지난 2018년 9월 DPAA 조사관들이 다시 파푸아뉴기니 와롬 마을을 찾아 현장 주민들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벌였다. 주민들로부터 “걸어서 반나절쯤 되는 거리에 비행기 잔해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같은 증언 외에 조사관들은 와롬 마을에 P-40 전투기의 부속품 여러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마을 주민들이 파커 중위의 유해 발굴과 관련한 결정적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마을 주민들의 말을 따라 전투기 유해 수색 작업이 진행됐지만, 험한 지형과 악천후로 현장에 직접 접근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육안으로 프로펠러 날 등 비행기 부속품의 모습을 확인했고, 현지 가이드를 통해 다른 잔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확보했다.

미 네브래스카주 오펏공군기지에 있는 DPAA 감식시설에서 최첨단 기법으로 미군 전사자 유해 신원 확인작업을 벌이는 모습. /미 오펏 공군기지 홈페이지

DPAA조사관들은 이듬해인 2019년 5월 다시 와롬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은 비행기 잔해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대신 주민들을 상대로 협상에 나섰다. 이 마을 주민들이 2차 대전 미군기 추락 현장에서 수습된 인체의 유해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DPAA는 와롬 마을 주민들이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 인체 유해를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DPAA는 마을 주민들과 강도높은 반환협상을 벌였고, 결국 인체 유해와 비행기 잔해들을 확보했다. 이렇게 확보된 물증들은 하와이에 있는 DPAA의 분석시설로 옮겨졌다. 참전군인의 유해는 종종 현장에서 수습되거나 아니면 이미 수습된 실종자 유해더미에서 확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근 주민들로부터 협상을 통해 반환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로버트 파커 중위의 이름이 새겨져있던 마닐라 미군 묘지의 실종군인 기념비. 그의 이름 옆에는 신원을 확인했다는 장미 리본이 붙게 된다. /미 참전기념비 위원회 홈페이지

하와이 분석실로 옮겨진 유해와 비행기 조각들의 성분을 분석하고 신원을 감식하기 위해 치의학·인류학·미토콘드리아 및 염색체 분석 등 각종 기술들이 동원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 3월 9일 실종상태였던 파커 중위의 신분은 ‘유해 확인’으로 바뀌었다.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미군 묘지의 실종자 명단 묘비에 있는 파커 중위의 이름 옆에는 신원이 확인돼 더 이상 실종자가 아님을 알리는 장미리본이 붙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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