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서울, 우리 발밑에 지하도시 한양도성이 있다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긴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도심 지하유적전시관에서 찾은 한양의 모습
피맛골의 변신
피맛골, 서울의 가장 중심에 있는 종로의 작은 뒷골목이다. 어떻게 들으면 섬뜩하게 들리는 지명은 조선시대 종로에서 달리는 말을 피해 서민들이 숨던 골목이란다. 요즘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는 연탄불에 타는 고기 냄새가 코끝뿐 아니라 온몸을 절게 하던 추억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인왕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세대를 가릴 것 없이 이 골목으로 모여들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왁자지껄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던 곳이다. 서울의 가장 중심에 있지만 서민들의 저녁 로망이 있었다. 그 지명이 뜻하는, 서민들의 애환이 배어 있다.
지난 20세기, 이곳의 풍경은 외모가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도시와 집의 구조만큼은 아마도 현재 발굴되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 복원 전시된 조선시대 건평방 일대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은 번득이는 유리창으로 덮인 고층건물이 이어지고 그 속은 커피 향이 퍼지는 멋진 공간으로 변신하여 그 당시의 살내음 나는 풍경을 볼 수가 없다. 요 근래 서울 중심에 진행된 도시개발은 조선 한양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셈이다.
피맛골에서 시작된 한양-서울 도시역사고고학
이제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다. 피맛골의 작은 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운 고등어에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 골목을 나서다 구덩이에 빠질 뻔한 아찔한 경험이 있다. 그 순간 술기운이 확 깨면서 구덩이 속이 들여다보였다. 상수도를 고치기 위해 보도블록을 걷어내고 한 1m가량을 좁게 판 구덩이 속에서 기다란 장대석이 보였다. 고고학자의 본능으로 ‘아, 저기 옛 한양의 유적이 남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후 피맛골을 개발하기 위해 이 일대 집을 걷어내고 건축 폐기물을 한동안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는데, 다행히도 그 속에서 조선시대 유물들이 확인되어 발굴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서울 도시역사고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 피맛골이리라.
발굴 과정에서 아주 정연하게 남은 육의전(조선시대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의 가옥구조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뒤이어 궁에서 사용하던 도자기나 수입 도자기들이 수습되어 조선시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졌다는 운종가(雲從街·오늘날 종로 일대. 육의전이 자리했음)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종로 지역이 개발되면서 여러 지점에서 발굴이 이뤄졌고, 지금도 육조거리(조선시대 6개 중앙관청이 있던 대로)가 있던 광화문 앞의 세종로나 공평동 일대 등 도심 곳곳에서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 수많은 고고학발굴보고서가 집성되어 새로운 한양 도성사를 만들 것이다. 서울 도심의 역사고고학적인 발굴은 현대와 이어지는 시기이고, 기록과 일치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에 흥미진진한 유적과 유물이 많다. 고대유적 발굴과는 또 다른 경이로움이 있다.
지하에 남은 조선 한양 오백년 생활사
조선시대의 집들은 나무와 흙으로 지은 것이 대부분이어서 오늘날 서울에는 이런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서울의 지하에는 한양 오백년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남아 있다.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서 드러난 지하 유구(遺構,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들은 서양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 발굴한 그 유명한 트로이 유적과 같은 구조라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집이 부서지면 부근의 흙을 가져다가 부서진 옛날 집 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살았다. 트로이 유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유적들은 새집을 지을 때마다 조금씩 높이가 높아지므로 평원에 작은 산처럼 남아 있어서 고고학자들은 언덕이라는 뜻의 텔(Tell)유적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서울 도심의 지하에 조선 초기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는 시기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오백년 세월을 보여주는 층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점에서 서울도 일종의 텔유적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성북구 중근동의 유적들처럼 둔덕으로 보이지 않고 지상이 평평하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한양 도성이 크게 변화한 시기는 임진왜란(1592~1598) 직후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청진동 뒷골목에서 볼 수 있는 20세기 집들의 아래에서 나타나는 시전과 민가들은 대체로 16세기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고, 그 아래에는 불탄 집이 많다. 이는 청진동 일대뿐 아니라 현재 발굴 중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서도 그 시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구조로 변화하는 것이 확인된다. 아마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성이 환골탈태하는 전환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변화를 거쳐 한국전쟁의 파괴로부터 재건된 도시가 오늘날에는 유리빌딩 숲으로 변해가고 있다. 현대에 들어 달라진 점은 집을 지을 때 파괴된 건물의 잔해를 없애고 바닥을 깊이 파서 짓는다는 것이다. 미래의 고고학자에게는 미안하게도 이 유리빌딩의 지하에는 남아 있을 것이 없다.
고고학자로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청진동 초기 발굴 현장에서였다. 20세기 아궁이와 온돌의 발전을 보여주는 층이 켜켜이 드러난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래식으로 나무를 때서 밥을 하고 방 구들을 데우던 아궁이가 연탄아궁이로, 그리고 다시 오븐과 온수보일러로 변화하는 지난 100년 동안의 부엌 현대화의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연탄이 19공탄에서 24공탄으로 바뀐 것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부엌에서 대대로 이어졌을 여성들의 살림살이 애환도 함께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조선시대 종로 일대는 최고의 부자동네였을 것이다. 그곳의 가옥들 가운데에는 여러 채로 구성된 큰 한옥도 있지만 작은 방 하나에 간신히 부엌이 딸린 집이나 흙바닥의 집들도 있었던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한양의 서민들은 주택난에 시달렸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물난리 걱정하던 한양도성 사람들
광화문의 육조거리나 종로 일대에서 발굴된 유적들의 층위를 보면 맨아래에 모래층이 켜를 이룬 곳이 많다. 바로 물의 흔적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형으로 보아 한양도성의 서민들은 아마도 매년 물난리를 걱정하며 살았을 것이다. 폭우가 오면 모든 물이 한꺼번에 가장 낮은 지역인 청계천으로 모여들어 종로나 을지로 등지는 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조선 초 태종 때 하천을 준설했고, 영조 때는 청계천을 준설했다. 세종 때에 측우기를 발명하고 다리에 수위를 표시한 것에서 당시 홍수에 민감했던 정황이 잘 드러난다.
오늘날 종로에서 을지로에 이르는 지역은 지대가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물이 배어든 유적이 상당하다. 유기물질을 다량 포함한 토층은 보통 시커멓게 나타나고 채 썩지 않은 나무가 남아 있는 유구가 많다. 목조가구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집도 있었다. 초기 청진동 발굴 과정에서 수습한 목재만 해도 여러 트럭분이 된다.
이를 보면 과거 서울의 도심에는 물길이 있는 곳에 습지가 많았을 것이다. 또 홍수가 발생하면 청계천이 범람했을 뿐 아니라 하수도나 변소의 오물이 넘치면서 온 도시에 악취가 풍겼을 것이다. 경복궁 담벼락 아래, 육조거리나 종묘광장 등 오수와 별 관련이 없는 지역에서도 기생충이 채집된 것은 바로 물난리의 흔적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낮은 지대에 집을 지을 때는 조금이라도 높게 지어야 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발굴 현장에서 옛날의 층들이 켜켜이 남아 있는 지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글로 씌어지지 않은 생생한 서울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기게 된 것이다.
지하유적전시관에서 상상하는 즐거움
경희궁 터의 외곽에서 몇 점의 주초석이 발견되면서 지하전시장이 조성된 이후 청진동 일대의 발굴로 육의전 전시관이 세워졌다. '조선시대 폼페이'로도 불리는 공평동 도시유적전시관과 서울시민청 아래에 자리한 16세기 불랑기자포(보물861호·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시키는 화기)가 출토된 군기시(軍器寺)유적전시관도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뒤편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안에 위치한 동대문역사관에는 조선시대 군사시설이었던 훈련원과 하도감(下都監) 유적과 그곳에서 수습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발굴 현장이 복원된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작은 도자기편 하나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날씨 좋을 때 초고층 건물들 사이에 남겨진 유적을 도보로 탐방해보면 어떨까. 서울의 조선시대와 현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고고학 여행을 하다 보면 새로운 발견과 감동의 순간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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