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수사'에 경종 울린 판사도 간첩 혐의자엔..

김형민 2021. 4. 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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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아무개 노인 살인사건의 피고인은 엄청난 고문을 당한 뒤 범행을 자백했다. 증거는 자백뿐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고문 수사와 자백 제일주의에 제동을 건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간첩 사건의 피고인에게는 예외였다.
1981년 윤 아무개 노인 살인사건 당시 범인으로 피해자의 조카며느리를 지목한 신문기사.ⓒGoogle 갈무리

한국에서 법을 어겨 처벌받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아주 오래된 속설이 있어. ‘6조지’라는 것이지. “형사는 때려 조지고, 교도관은 세어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서 조지고, 감옥 간 사람은 먹어 조지고, 가족들은 재산을 팔아 조진다”라는 것이지. 판사는 재판을 미뤄서 피고인을 골탕 먹이고, 검사는 조사한다며 수시로 불러서 괴롭히며, 교도관은 검열과 확인을 위해 숫자를 세어 골치 아프게 하고, 수감자의 가족은 재판 비용을 대다 가산을 탕진한다는 뜻이야.

이 중 형사는 ‘때려 조진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그리고 해방 이래 오랫동안 형사는, 즉 경찰은 ‘때려 조지는’ 분위기에 익숙했어. 영화 〈범죄도시〉에서는 형사 아저씨들이 은근슬쩍 CCTV를 가리거나 ‘진실의 방’에서 범죄자들을 혼내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CCTV가 없었던 시절에는 경찰서 전체가 ‘진실의 방’이었고, 그 진실을 캐는 도구는 튼튼한 몽둥이일 때가 비일비재했단다. 1967년 11월 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됐다가 알리바이가 성립돼 풀려난 사람이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한 일이 있었어. 그때 서울시경 수사과장의 변명은 자그마치 이랬다. “뺨 몇 대면 몰라도 고문은 안 한 걸로 안다(〈동아일보〉 1967년 11월18일).” 즉 뺨 몇 대는 ‘고문’도 아니었던 거야.

알리바이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냅다 피의자를 때려 ‘조졌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지. 자백은 증거의 여왕이었거든. 증거든 뭐든 두들겨 패서 자백만 받아내면 검사가 알아서 불러 ‘조지고’ 판사가 대충 미뤄 ‘조져’줄 터이니까. 그런데 이 몹쓸 관행에 공식적인, 아니 역사적이라 불러도 좋을 제동이 걸린다. 1981년 일어난 윤 아무개 노인 살인사건이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10억원대 재산가(요즘으로 치면 100억원대는 되겠지)’ 윤 노인은 집 안에서 가정부와 아홉 살 수양딸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어. 그들은 망치로 수없이 강타당한 뒤 목 졸려 살해됐다. 경찰은 원한관계에 의한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조카며느리인 고나리씨(가명)를 범인으로 지목했어. 아파트를 사달라고 조르다가 윤 노인이 완강히 거부하자 앙심을 품고 일을 벌였다는 것이지. 그런데 경찰의 발표는 처음부터 이상했단다.

“알리바이를 열두 번이나 번복하고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안 돼 수사에 애로가 많았다. 범행 당시 입었던 원피스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백 내용과 정황증거 등이 공소 유지에 충분할 것으로 확신한다(〈한국일보〉 1981년 8월18일).” 즉 자백 외에는 유력한 증거가 없었던 거야. 경찰은 자백을 근거로 고나리씨의 집을 수색해서 그녀가 훔쳐왔다는 윤 노인의 패물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패물은 사건 현장을 수색했던 형사가 보관하다가 노인의 조카며느리 고나리씨에게 맡긴 것이었어. 형사는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지만 깔끔하게 무시됐다.

고나리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경찰서 지하실은 물론 호텔방까지 끌려다니며 엄청난 고문을 당했어. 물고문은 기본이고, 범 같은 형사들이 허리를 짓밟으며 자백을 강요했고 자백하지 않으면 죽어서 나간다며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안겨줬다. 비슷한 시기 전주에서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고문을 받고 범행을 자백했다가 알리바이가 입증돼 풀려난 김 아무개씨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 “억울하게 교수대에서 사라지더라도 몸이나 성하게 죽자 싶었다(〈동아일보〉 1987년 1월19일).” 고나리씨도 비슷했다. “살려만 준다면 아무것이나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인생 포기의 순간에 자백을 한 것입니다(〈대한 국민 현대사〉 고경태 지음).”

경찰도, 검찰도 믿는 구석은 오로지 이 자백이었어. 검찰 수사관은 “결정적인 순간에 법정에 내밀 히든카드가 있다”라며 고씨를 틀림없는 범인으로 찍었지. 물론 히든카드(?)는 ‘자백’뿐이었어. 검사가 직접 수사 현장에 나가 고씨와 대담을 벌여 범행 사실을 소상히 자백한 육성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가 그 히든카드의 정체였던 거야. 검사 앞에서 또박또박 자신의 범행을 자세히 자백했으니 판사 앞에서도 인정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자는 그 검찰 관계자가 ‘어딘가 자신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고 기사를 맺고 있다(〈동아일보〉 1981년 11월27일).

수사기관의 큰소리와 달리 1982년 2월1일 윤 노인 살인사건의 피고인 고나리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고씨는 사건 전 건강한 보험 외판사원이었으나 구치소 수감 당시 허리, 가슴 등에 멍이 남아 있고 팔이 빠져 있는 등 고문 사실이 인정되므로 고씨의 자백은 임의성이 없다.” 법정에서 고나리씨는 허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했고 이는 고문의 결과로 보였어. 경찰은 고씨가 쇼를 하고 있으며 원래부터 디스크 환자였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스로의 발언을 뒤집는 격이었지. 허리 디스크에 시달리는 여인이 “세 명을 망치로 때려눕히고 목을 졸라 살해하고 패물을 훔쳤다”라고 했으니 말이야. 경찰의 망신은 계속 이어졌다. 고씨에게 “검찰 수사에서 헛소리하면 다시 고문을 시작하겠다”라고 협박했던 장본인 하 아무개 형사가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 윤 노인의 통장들을 빼돌린 일이 들통 난 거야. 경찰이 수사 중에 도둑질을 한 셈이지.

한 발 떼도 다른 발까지 떼지 못하면

고나리씨 사건을 통해 김헌무 판사는 당시 한국에 만연했던 고문 수사와 자백 제일주의에 제동을 건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고씨를 짓밟았던 수사기관에 그 책임을 묻지도 못했고, 고문 경관들은 그로 인해 처벌받거나 징계를 받지도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역사적인 판결이 있기 석 달 전 김헌무 판사 역시 고문 피해를 호소하는 피고인에게 몸 한번 살펴보지 않고 서슴없이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거야. 바로 ‘진도 간첩단’ 사건이었지. 일반인이면 몰라도 간첩 혐의자에게는 ‘인권’ 따위 적용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이후 ‘진도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은 2008년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한 발을 겨우 떼더라도 다른 발을 따라서 떼지 못하면 결국 사람은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단다. 김헌무 판사가 그랬고, 대한민국이 그랬다. 고문 수사에 대한 제동은 걸렸지만 그 브레이크는 시국 사건 앞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어. 1986년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1987년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이어졌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고문 형사를 태운 차량이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도착했다. ⓒ연합뉴스

고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확증편향을 지니고 있었어. 즉 어떤 사람의 죄를 따질 때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저 사람이 범인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이 앞섰기에 물 채운 욕조에 사람 머리통을 틀어박고 허리를 짓밟을 수 있었던 거란다. 고문의 이유는 결국 요즘 말로 하면 ‘답정너’, 즉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말만 하면 된다’는 발상이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오늘날 툭하면 벌어지는 여론재판, 즉 증거를 따지기에 앞서 서슬 푸르게 누군가를 매장시키고 단죄하기에 바쁜 풍속도에서 고문의 그림자를 느끼기도 한단다. 주전자와 몽둥이는 없지만 사람에 대한 존중을 무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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