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조선학교 어머니는 바쁘다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2004년으로 기억한다. 한참 영화 <우리학교>를 혹가이도(홋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에서 촬영할 때의 일이다. 친하게 지내던 중급부 학생들 10명 정도와 라면을 먹으러 갔다.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는데 좀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학급은 남학생과 여학생의 비율이 거의 같았는데 대략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정확히 성별을 구분해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남학생은 안쪽에, 여학생은 바깥쪽에. 그러더니 여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수저와 컵을 남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을 따르고 서빙을 했다. 그 와중에 남학생들은 손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 '대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오히려 이상했는데.
'여성이 남성을 지원해야 한다'는 이 사고방식이 조선학교에서 습득된 걸까, 조선사람의 공동체 또는 가족을 통해서 학습된 걸까? 그로부터 무려 17년이 흘렀으니 이런 관습은 이제 없어졌으리라 기대하고 싶다. 이국땅에서 지켜야 할 민족성의 범주 안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할 수 있다. 말과 글, 전통의상, 세시풍속 등등. 거기에 '남존여비'를 포함해 공동체를 공고히 해 온 것이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임은 지난 글에서도 다루었다.
다만 농담이든 위로든 비아냥이든, 동포들 사이에 '통'하는 말이 있는데 '재일조선인 사회는 여성들이, 특히 어머니들이 지킨다'라는 것이다. 발화자가 그 공동체의 남성 웃어른이나 총련의 제법 높은 위치의 남성 간부라면 이 문장은 제법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남존여비'가 뿌리 깊게 지배해 온 생활과 사고방식 속에서 여성에게 책임 있는 간부, 자리를 내어 준 경험이 그리 없는 공동체에 소속된 남성이기 때문이다. 미움받지 않기 위한 달콤한 위로의 말 쯤으로 인식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발화자가 여성일 때는 조금 다르다. 과연 그러하니까.
재일조선인총연합(총련)에는 다양한 부문 조직이 있다. 청년상공회, 청년동맹, 문학예술가동맹, 교직원동맹 등등. 그중에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이 있다. 1947년 10월에 결성되었으니 재일조선인연맹(조련) 결성 1년 후가 되겠고 조련의 후신인 총련(1955년 결성)보다도 긴 역사를 자랑한다.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동포 여성과 함께, 동포 여성을 위하여'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걸려 있다.
십몇 년 전이던가? 이 여맹의 전국대회를 구경한 적이 있다. 중앙본부, 지방본부, 지부, 분회가 일본 전국에 산재해 있으니 소속 일꾼의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이 대회의 주 참가자들은 그 일꾼들이 모집해 데려온 조선학교의 어머니들이다. 지금도 조선학교는 전국에 60여 개, 학생 수가 7000여 명이 넘으니 그 어머니들이 모인다면 어떤 풍경일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너무 규모가 커서 '서일본 어머니 대회'와 '동일본 어머니 대회'로 나누어 진행한다. 각각 약 1000여 명 안팍의 인원이다. 게다가 행사 기간이 무려 1박 2일이다. 단순히 한 데 모여 구호를 외치고 간부들의 연설을 듣는 자리가 아니다. 분회, 지부별로 모여서 1박 2일 동안 다양한 강의를 듣고, 체험 행사를 하고, 토론과 학습을 한다. 주제는 대부분 '아이 키우기'이다. 그중에서도 '민족교육'이 중심을 차지한다.
총련에는 지금도 다양한 전국적 행사가 매월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청년상공회 주최의 '민족포럼'과 문학예술동맹 주최의 '재일조선학생예술경연대회' 다음으로 큰 행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와 비슷한 행사로 선생님들의 '교육연구대회' 또한 대단한 규모다.
위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부문 조직의 중요 행사의 주제는 '민족교육'이다. 해방 후 현재까지 70여 년이 넘게 '조선학교'가 민족교육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여맹'의 지역 일꾼들이 가장 밀접하게 사업하는 대상이 바로 '어머니회'.
어머니회는 각 조선학교에 하나씩 있다. 어머니회의 회장, 부회장, 총무 등을 어머니회 역원이라고 표현하고 여맹의 일꾼(활동가)이 이 역원 및 어머니회 회원들과 사업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회 회원은 학생의 보호자이므로 학생이 졸업하는 동시에 어머니회에서 나간다. 어머니회의 활동을 보자.
첫째, 학교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 있다.
아주 옛날 멸시받던 김치는 이제 일본인들의 인기 반찬이다. 조선사람이 만든 김치를 먹고 싶은 건 '원조'를 따지는 우리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일본인들과 함께하는 무슨 행사가 있으면 어머니회는 김치, 지지미(부침 요리), 비빔밥 등을 만들어 판매해서 수익을 챙긴다. 조선학교에 방문해 보면 칠판이나 피아노, 의자, 컴퓨터, TV 등의 각종 비품에 '제00기 어머니회 기증'이라는 표식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학교 재정을 지역의 동포들이 책임지는 시스템으로 꾸려지는 조선학교이기에 기부금이 들어오면 선생들 월급 주기에도 빠듯하다. 학생들 비품은 이렇게 마련하는 게 보통인 셈이다. 가령 학교 통학버스에 '어머니호' 또는 '아버지호'라고 이름 붙어 있으면 어머니회 또는 아버지회에서 기증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둘째, 학생들을 위한 면학 분위기(?) 조성 활동이 있다.
일주일에 1회 또는 2회, 어머니회에서 마련하는 점심 급식이 대표적이다. 조선학교는 일본 정부의 지원이 없다.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재정이 어려우니 급식은 힘들다. 대부분의 학교가 도시락이다. 선생님들도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다. 오늘은 어머니 급식의 날이라고 하면 아이들이 들뜬다. 오늘의 메뉴는 무엇일까? 급식을 받으면서 만나는 친구의 어머니와 눈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집단주의'교육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조선학교에서 집단으로서의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학교를 경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학교는 선생님과 학생들만 지키는 공간이 아니라 어머니들, 아버지들이 함께 있는 공간이다.
셋째, 아이들의 인권을 지키는 활동이 있다.
이 활동에서 재일조선여성들은 탁월한 업적을 성취했다. 해방 후의 조선학교 폐쇄에 맞선 항의 운동에서부터 60년대 외국인학교법안 철폐 운동과 각종학교 지위 쟁취까지 그들은 가장 앞에서 싸웠다. 90년대 중반의 '학생 통학 할인율 차별'을 철폐시킨 것도 치바 어머니들이었다. 거리에 나가 욕설과 비방을 들으면서 서명운동을 벌였으며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어머니회 조직이 큰 역할을 한다. 2011년에 지진이 났을 때는 도호쿠 조선학교의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지어 피난처의 일본 시민들에게 공수했다. 당시 고교무상화에서 제외된 조선학교의 억울한 처지를 국제사회에 호소하자고 종이학 접기 운동을 펼치고 제네바의 UN 본부 앞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연좌 농성을 했던 것도 어머니들이었다. 교토의 조선학교를 재특회가 습격했을 때 기나긴 재판투쟁에서 승리를 견인했던 것도 교토의 어머니들이었다. 오사카에서 도쿄에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펼쳐지는 항의 행동도 어머니들이 중심이다. 최근의 코로나 정국에서도 유아교육 보육의 무상화에서 제외된 조선학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장 먼저 일어난 집단도 어머니들이었다.
하나하나 일일이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학교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재일조선인 사회를 지키고 아이들의 정체성을 지켜온 그녀들의 투쟁의 역사가 바로 재일동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전에 급식을 위해 학교로 달려갔다가 오후에는 학교 비품 마련을 위해 김치를 팔고, 곧장 고교무상화 재판이 있는 법원 앞에서 소리치며 '차별 철폐'를 외치던 어머니는 그날 저녁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트타임으로 일하러 간다. 조선학생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자란다.
다음에는 아버지들 이야기를 해 보자. 여기도 만만치 않다.
sse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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