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은 거들뿐.." 잠실 달군 '팔굽혀펴기 왕자'의 만화 슬라이딩

장민석 기자 2021. 4. 24. 04:5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권수와 아내 미야타니 유에. / 미야타니 인스타그램

“왼손을 보여주고 오른손으로 승부했다.”

나름 수많은 스포츠 취재 현장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무협지 같은 ‘득점 후기’는 처음이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같은 느낌이랄까. 얼핏 듣고는 만화 ‘슬램덩크’의 명대사 ‘왼손은 거들 뿐’이 떠올랐다.

이는 두산의 안권수(28)가 23일 NC전에서 절묘한 슬라이딩으로 득점을 뽑아낸 순간을 회상하며 뱉은 말이다.

때는 두산이 2-0으로 앞선 7회말. 상황은 이랬다.

안권수는 발이 느린 호세 페르난데스를 대신해 대주자로 2루에 있었다. 김재환이 친 땅볼은 NC의 수비 시프트에 걸렸다. 보통 2루수가 서는 위치보다 한참 뒤에 서 있었던 지석훈이 이를 잡아 가볍게 1루로 던져 김재환을 잡았다.

하지만 안권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3루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홈으로 내달린 것이다. NC 1루수 이원재가 다급하게 홈으로 공을 뿌렸다.

타이밍상 아웃으로 보였다. 안권수는 왼팔을 쭉 뻗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미끼였다. 안권수는 순간적으로 왼팔을 접으며 NC 포수 양의지의 태그를 피한 뒤 오른손으로 홈 베이스를 찍었다.

마치 전성기 이종범을 연상시키는 환상적인 슬라이딩이었다.

엉겁결에 미끼를 물어버린 양의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NC가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원심대로 세이프였다.

두산 안권수가 재치 있는 슬라이딩으로 득점을 뽑아내는 장면. / 연합뉴스
두산 안권수가 절묘한 슬라이딩으로 NC 포수 양의지를 피해 득점에 성공한 뒤 세이프 모션을 취하고 있다. / 최문영 스포츠조선 기자

이 장면을 묘사하는 안권수의 무용담을 들어보자.

“2루에서 상대 수비 위치를 확인하고 여차하면 홈으로 대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불규칙 바운드 등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3루로 향해 뛰는데 (고영민) 코치님이 팔을 돌리셔서 자신 있게 홈까지 달렸습니다. 아웃 타이밍이었지만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본 순간 상대에게 왼손을 보여주고 오른손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김태형 감독은 경기 후 안권수의 재치 있는 주루 플레이를 칭찬했다.

고시엔 대회 당시 대기 타석에서 팔꿉혀펴기를 하는 안권수. / 인터넷 커뮤니티

많은 팬에게 명장면을 선사한 안권수는 어떤 선수일까. 그는 일본 사이타마현 출신의 재일교포 3세 선수다. 일본 이름은 야스다 곤스.

일본 야구팬들은 그의 이름은 기억 못 해도 ‘팔굽혀펴기 왕자’라고 하면 ‘아~ 그 선수’라며 알은체한다.

와세다실업고 재학 시절인 2010년 안권수는 고시엔(甲子園·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대회에서 4할 타율(15타수 6안타)로 팀을 4강까지 끌어올렸다. 당시 부드러운 타격을 위해 팔 힘을 뺀다며 대기 타석에서 ‘푸시 업’을 하는 모습이 포착돼 ‘팔굽혀펴기 왕자’로 불렸다.

명문 와세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개인적인 이유로 야구부를 나왔다. 그래도 글러브를 벗지는 않았다.

전용 구장 하나 없는 독립리그 팀 무사시 히트 베어스에서 뛰면서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설까지 나왔지만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2016년 와세다 대학 사회과학부를 졸업한 그는 결국 일본 사회인 리그 팀 카나플렉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공보다는 콘크리트와 씨름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땅 아래로 파이프와 파이프를 이어 전기를 흐르게 하는 콘크리트 패널을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오후 1시 시작한 공장 일은 오후 8시 반쯤이 되어야 끝이 났다.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퇴근한 그는 날 밝기가 무섭게 다시 공을 잡았다.

야구 연습은 오전 7시 반부터. 잠은 늘 모자랐지만 ‘継続は力なり(꾸준함은 힘이 된다)’란 말을 되뇌며 힘든 시간을 버텼다.

포기하지 않았던 안권수는 2020시즌 KBO 드래프트에서 거의 마지막인 2차 10라운드 99순위로 지명을 받아 ‘코리안 드림'을 향한 한 발짝을 내딛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일본에서 살면서 국적을 바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기회를 얻게 됐다”며 기뻐했다.

작년 스프링캠프 당시 안권수. / 두산 베어스

안권수는 작년 스프링캠프 신인 체력 테스트에서 예닐곱살 어린 동기들을 제치고 1등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수비와 주루 실력을 인정받아 1군에 합류했다. 지난해 기록은 68경기 출전에 타율 0.270, 10안타 3타점. 올 시즌엔 4경기 출전만에 잊지 못할 장면을 만들어 냈다.

굴곡 많은 야구 인생이었지만, 지난 1월엔 웨딩 마치를 울리며 인생의 홈런을 날렸다. 아내인 미야타니 유예는 일본 아이돌 출신 모델. 그룹 ‘아키시부 프로젝트’에서 리더를 맡아 2013년부터 2019년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작년 본지 인터뷰에서 안권수는 자신의 야구 철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나가서, 어떻게든 홈플레이트를 밟아야 한다는 게 제 야구 철학입니다. 야구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쭉 그랬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