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취향의 첫걸음

남상훈 2021. 4. 2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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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물·사람·장소일지라도
뭐라 부르냐에 따라 의미 달라
자신만의 이름 붙이는 것 쌓여
개성있는 취향 형성에 영향 줘

온라인 수업시간에는 출석부를 부르지 않아도 출석확인이 된다. 전에는 출석부를 부르는 그 짧은 시간이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틈틈이 익혀둘 자연스러운 기회였다. 한 번 부르면 바로 외워지는 이름도 있고 여러 이름 속에 자꾸 파묻혀 잊히는 이름도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상에 영향을 준다. 셰익스피어는 ‘장미는 뭐라 불러도 장미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가끔 장미라는 단어에는 본연의 ‘장미-스러움’이 깃들어있다고 느낀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듯, 그 이름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파블로 피카소, 누가 들어도 예술가다운 이름이지 않은가. 주어진 이름을 가지고 수십 년을 그렇게 불리며 지내다 보면, 어쩌면 인생 자체가 그 이름의 분위기에 맞게 바뀌는 게 아닐까 싶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격음이 있어 강한 발음을 내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어딜 가서나 확실하고 똑 부러지게 자기주장을 하는 성격일 것 같고, 모음과 이응이 많아 부드러운 소리로 불리는 이름의 소유자는 별 부딪침 없이 유하게 사회생활을 할 것만 같다. 이름으로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정관념을 작동시키는 일이다.

행동과학자 프라기야 아가왈은 저서 ‘편견의 이유’에서 이름뿐 아니라 얼굴, 인종, 성차 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암묵적인 편향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이슬람 여자는 나대지 않는다’라든지 ‘아시아인은 수학에 뛰어나다’는 것이 그 예이다.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감지하는 능력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고 한다. 적인지 내 편인지 재빨리 파악하려면 시행착오를 거치며 오래도록 누적시켜온 편향성을 자기도 모르게 적용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암묵적인 편향이 바로 타인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만드는 주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편향을 뜻하는 영어 bias는 ‘비스듬히 자르다’, 또는 ‘비스듬한 선’을 뜻한다. 옷을 만들 때 45도 각도의 사선으로 자른 천을 이어붙인 것을 바이어스테이프라고 하는데 어깨나 겨드랑이, 소매 등 곡선 부분이 생기는 끝단 마무리에 쓴다. 비스듬하게 늘어나는 속성을 지닌 천이라 융통성 있게 곡선을 감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편향이라고 하면 고정관념으로 이어지는 경직된 치우침을 뜻하는 줄 알았더니, 단어 자체는 오히려 반대의 의미에 가깝다. 융통성이 없는 것은 사선이 아니라 직선이다.

K팝 용어에서 bias는 ‘최애’라는 강한 선호를 의미한다. 가령 ‘방탄소년단 멤버 중 RM이 가장 좋아요’를 영어로는 ‘My bias is RM’이라고 한다. 세상에 치우침이 없는 취향, 치우침이 없는 개성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 편도 옹호하지 않고 정확히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좋다면, 그것이 과연 문화이고 예술일지 의심스럽다. 편향이 나쁜 이유는 낙인과 차별을 만들기 때문이지, 편향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피카소 아버지의 성은 루이즈였고, 어머니 쪽 성은 피카소였다. 좀 더 임팩트 있게 예술가다운 개성을 필요로 했던 야심 많은 파블로는 루이즈를 중간 이름에 숨겨 넣고 대신 어머니의 성 피카소를 앞에 내세웠다. 만일 그가 파블로 루이즈라는 예술가로 계속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일본과 우리나라에 다수 지점을 가진 ‘폴 바셋’이라는 커피전문점이 있다. 폴 바셋은 2003년에 호주에서 열린 바리스타 경연대회에서 수상한 사람의 이름이다. 역대의 수많은 수상자와 뛰어난 바리스타 중에서 왜 하필 폴 바셋을 상호로 택했을까? 여럿 중에서 그 이름을 불러보는 순간 커피를 떠오르게 하고, 커피전문가답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장미는 뭐라 불러도 장미이겠지만, 뭐라 부르는 것에 따라 장미의 의미는 달라진다. 꽃에 무슨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는 작은 시간이 쌓여 결국엔 개성 있는 취향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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