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권과 기분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정연 2021. 4. 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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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의 질문]
남성의 기분권 행사에 언론이 주목하고, 여성의 기본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동료 시민이 기본권을 외칠 때 남성의 기분권을 앞세우는 사람은 사회의 일부라고 믿고 싶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정연 ㅣ  젠더팀장 겸 젠더데스크

‘4월11일 피해자를 강간한 남성 2명을 현장에서 검거.’

‘4월17일 피해자를 3일간 성폭행, 불법촬영하고 돈을 훔친 20대 남성을 검거.’

‘4월19일 직장 동료를 흉기로 찌른 20대 남성을 검거.’

지난 2주 사이 알려진 여성 대상 강력범죄다. 하루가 멀다고 들리는 이런 범죄 소식에 먼저 덮치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닌 ‘지친다’이다. 지난 1년 동안 <한겨레>의 젠더데스크로, 또 지난 다섯달간 젠더팀의 팀장으로 일하며 여성 대상 범죄 뉴스에 촉수를 세워야 했다. 기사에 잘못된 범죄 및 가해자 묘사는 없는지, 2차 피해를 줄 수 있는 표현은 없는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촉수는 바쁘게 일했다. 몇달 전부턴 일을 마친 뒤엔 ‘번아웃’(소진)이라는 게 이런 걸까, 자주 스스로 물었다. 이 소진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따져보기도 했다. 자신을 잘 돌보는 시간, 몰입할 수 있는 취미 등등이 있었다. 정말, 이게 다일까? 아니다. 무엇보다 이런 범죄 뉴스를 덜 볼 수 있는 날, 소진의 극복은 가능해 보인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9년 강력범죄 가운데 강간 사건은 5310건 발생했다. 하루에 14.5건꼴이다. 검거된 사람 가운데 남성은 6081명, 여성은 96명이다. 지난 11일 사건처럼 하나의 사건에 다수의 가해자가 있을 수 있어 사건 수보다 검거자 수가 많다.

이런 현실에 직면해 닿은 결론이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조심해야 한다’로 이어져선 안 된다. 여성의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그 ‘기본권’의 보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사회의 일부 구성원은 ‘생명을 위협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설명하는 사람에게 ‘불쾌함’을 느낀다.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는 게 기분 나쁘다고 한다. 14개월 전 공개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양평원)의 강의 영상이 최근 논란이 된 이유는 이 사회 일부 구성원(일부일 거라 믿고 있다)이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초 커뮤니티가 이 영상을 주목한 즈음부터 11일, 17일, 19일 남성이 가해자인 여성 대상 범죄가 세상에 알려졌다. 한 에스엔에스(SNS) 이용자가 양평원 영상 논란에 대고 “여성의 기본권과 남성의 기분권”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쯤에서 다음주의 질문을 던져본다. 기본권과 기분권 가운데 어떤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가?

기분권 행사에 언론이 주목하고, 기본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 생존권,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이 보장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여성들은 사회의 변화가 요원하니 어쩔 수 없이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안전비용’을 치른다. 드라마 <런 온>에서 주인공 오미주(신세경)는 호신용으로 권총 모형을 들고 다닌다. 드라마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를 비롯해 친구들이 메신저를 쓸 때 프로필 사진으로 자신의 얼굴 사진을 쓰지 않는다. 딥페이크(얼굴 등을 합성해 가짜 동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내 얼굴이 쓰일까 싶어서 걱정스럽다.”(이아무개·24) “안전한 동네, 안전한 집을 구하다 보면 월세가 점점 올라간다. 골목 안의 집보다 더 좁은 집인데 월세를 더 내야 한다.”(서아무개·26) “불법촬영 감지를 할 수 있다길래 셀로판지를 갖고 다닌다. 집 바깥에서 화장실을 써야 할 때 꼭 꺼내 쓴다.”(권아무개·33) 잠재적 가해자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와 나의 생명과 안전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보통의 사람이다. 특별한 감수성, 예민함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닌 이씨나 서씨, 권씨처럼 보통의 사람이다.

믿고 싶은 게 있다. 여성을 비롯한 동료 시민이 기본권을 외칠 때 기분권을 앞세우는 사람은 일부 아닐까? 극히 일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동료 시민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해하거나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이 질문에 모두 ‘맞아’가 답일 거라 믿고 싶다. 김예란 광운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이렇게 진단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정말 다양한 의견이 오가게 되는데 기사에선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용자들이 이렇게 말했다’라는 식으로 쓴다. 일부 의견을 익명화해서 그것이 전체의 목소리처럼 보이게 하는 전략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전체의 목소리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목소리, 참신한 시각은 정작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론이 어떤 사안에 대해 지형을 구축하면서, 다른 목소리는 계속 떨어져 나가 버린다.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의 의견이 정말 전체의 의견일 리 없는데 말이다.”

페미니즘 반대를 외치는 한 인사가 최근 기고문에서 “여성을 좋아한다”고 썼다. 여성의 기본권 주장을 일축하고, 여성혐오적 시각을 여과 없이 전시하며 “그런데 나는 여성을 좋아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여유라니! 이런 목소리가 남성 전체의 의견일 리 없다. 그렇게 믿는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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