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의 대한독립만세 시위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있었다
[김병찬 기자(design8517@naver.com)]
“마산의 대한독립만세 시위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겨레가 힘을 합쳐 3‧1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한 지 21일째인 1919년 3월 21일 오후 옛 마산장터에서는 삼랑진으로 떠나는 기차 소리에 맞춰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다. 군중 속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며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일제 경찰에 진압되고 수십여 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는 끝났지만 3월 26일 옛 마산장터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시위 과정에서 잡혀간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오동동에 있는 마산감옥으로 향한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감옥 안에서도 대한독립만세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나왔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조차 제복을 벗고 만세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마산에서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언제나 학생들이 함께했다. 어느덧 마산의 학생들은 항일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경남학생독립운동이야기 ‘항쟁’ 중/경남교육청 2019년 발간>
일제강점기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항일운동을 주제로 한 ‘경남학생독립운동이야기 항쟁(抗爭)’ 기록전시회가 23일 옛 ‘추산정’이 있던 창원시립마산박물관 야외광장에서 열렸다. 추산정은 1919년 3월 3일 고종(高宗)의 국장(國葬) 참관을 위해 모인 군중에게 지역 출신 김용환이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면서 마산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19세기 말부터 근대적인 중요 항구로 개발된 마산은 지난 2010년 7월 1일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재편됐다. 1960년대 3‧15 마산의거와 1979년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 당사 점거농성과 강제진압 사건이 도화선이 된 부마민주항쟁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근현대사에서 권력의 부정과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정의를 되찾기 위한 마산지역의 저항정신은 외세의 폭압에 대한 민족적 저항운동에 맥이 닿아 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있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빼앗긴 이후 1912년 일왕이 바뀌자 곳곳에서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일제는 마산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해 창동 불종거리에서 마산부 청사까지 축하행진을 진행하며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일본 경찰이 탄 말을 작대기로 때려 하천으로 떨어지게 했다.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다음날 일본 헌병들이 사건과 관련된 학생과 교사를 내놓으라고 학교를 위협했다.
창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주모자는 없다. 함께한 행동이니 잡아가려면 모두 연행해 가라”고 맞섰고, 호주 선교사가 학교 교장이었던 까닭에 일본 헌병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새로운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벌인 기념행사에 찬물을 끼얹은 학생들의 저항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1919년 4월에는 현재 성호초등학교인 마산공립보통학교 어린 학생들 수백 명이 운동장에 모여 3일 동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황한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만류했지만 만세시위가 그치질 않자 결국 등교 중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 일은 당시 ‘매일신보’ 4월 28일자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나이를 불문한 마산지역 학생들의 일제 저항운동은 ‘신사참배 거부’로 이어지기도 했다.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침략전쟁을 확대하던 일제는 1937년 12월 13일 난징을 함락한 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마산 각 관공서와 학교에 제등행렬 준비와 함께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당시 마산지역 모든 학교가 이 행사에 동원됐는데 창신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신사참배 순서가 되자 그냥 지나쳐버렸다. 이후 일제 경찰은 창신학교에 대한 감시와 압박을 더욱 강화하며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교육칙어 암송 등을 강요했지만, 학생들은 줄기차게 거부했다.
일제에겐 눈엣가시였던 창신학교는 결국 1939년 7월 14일 강제 폐교됐다. 조선총독부가 신입생 모집을 금지하고 교사에 대한 사찰 강화와 함께 학부모들에게 “사상이 불온하니 배후를 조사하겠다”고 협박하며 탄압을 지속한 결과였다. 같은 날 의신여학교도 폐교됐다.
일제의 군국파시즘적 탄압으로부터 민족혼을 충격적으로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적 사건도 있었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 때 일본 심판진의 편파 판정으로 일본인 학교가 우승을 차지하자 한국인 학생 1000여 명이 금지곡 ‘아리랑’과 ‘도라지’ 등을 목소리 높여 부르며 항의했다.
울분을 참지 못했던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행진까지 벌였고, 대회 심판장이었던 일본군 대좌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해 그를 구타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것으로 응징했다.
이 사건으로 붙잡힌 200명 중 주동자로 지목된 11명이 구속 기소됐고 15명이 투옥됐다. 옥중생활을 마치고 나온 15명 중 김선갑과 김명수는 출옥 2주 만에 후유증으로 순국하기도 했다.
일명 ‘노다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과 관련해 지난 1993년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경남 출신 학생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7명이다. 김인규(양산)‧김선갑(창원)‧이달희(창원)‧남기명(통영)‧이병도(하동)‧이세기(하동)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고, 전병철(밀양) 선생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이외에도 1930년 1월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을 들은 마산공립상업학교(현재 마산용마고등학교) 학생들이 비밀리에 모여 대규모 학생 항일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작성한 ‘격문사건’과 1944년 마산공립중학교 3학년들이 결성한 ‘마(산)중독립당’ 주축의 ‘대한학생독립당 사건’도 있다. 대한독립당 사건의 경우 조직 구성원들끼리 반일 내용의 책을 돌려가며 읽고 독서토론회를 가진 것이 발각돼 주모자로 지목된 김학득이 투옥돼 고문과 심한 고초를 겪었고 광복이 된 후에야 석방됐다.
마산공립중학교 ‘비밀결사’ 활동도 있다.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일본이 패하면 광복을 맞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마산공립중학교(현재 마산중‧마산고) 학생들이 독립을 마중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3학년 김희구와 동기생 조우식, 김해공립농업학교 강부근이 1943년 12월 ‘경남학생건국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연합군 측에 정보를 제공한다는 계획으로 마산과 진해 방면의 일본군 군사활동을 탐지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4년 일본 학생의 신고로 조직이 발각됐다. 김희구는 그해 7월 체포됐고 인천 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을 몇 달 앞둔 3월 순국했다.
경남교육청이 마련한 이번 기록전시회는 이와 관련한 역사적 기록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됐다.
경남교육청 문채경 기록연구사는 “전시회 장소인 창원시립마산박물관은 마산지역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추산정이 있던 자리였다”며 “이곳에서 시작된 마산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되새기고 학생독립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교훈과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록전시회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이경구 총무과장은 “3‧1운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은 우리 지역 경남에서 가장 강렬하고 오랫동안 지속됐다”며 “역사는 미래의 뿌리인 만큼 이번 전시가 우리 고장에 대한 자긍심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기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병찬 기자(design85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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