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피해자님이여" 현충원 사과쇼는 또 다른 N차 가해다

양범수 기자 2021. 4. 2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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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모욕적이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피해자가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작성한 현충원 방명록 내용에 보인 반응이다. 윤 위원장은 전날(22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현충탑 참배를 마치고 방명록에 "선열들이시여! 국민들이시여! 피해자님이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적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 변호인인 김재련 변호사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 담기지 않은 가식적인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며 "사과, 그 진정성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놔도 '0'이다. 이러한 행위는 피해자를 더 괴롭힐 뿐"이라고 했다.

윤 위원장이 '피해자님이여'라고 한 것이 알려지자 정치권에서는 '박 전 시장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그동안의 지칭 방식 변천사'가 회자됐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한 지난해 7월 당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피해 호소 여성'의 아픔에 위로를 표한다"고 했다. 명백한 피해자를 피해자로 지칭하지 않은 민주당의 오만한 태도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심지어 이 전 대표는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입장을 묻는 기자를 향해 "XX 자식"이라는 욕설을 했다.

이낙연 전 대표는 "피해를 호소하시는 고소인"이라고 불렀다가 국가인권위원회가 박 전 시장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판단하자 뒤늦게 "피해자와 가족들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정정하는 소동을 벌였다. 당시 여성 의원들 사이에서는 '피해자를 피해자로 호칭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여성운동을 했다는 남인숙 의원이 '피해호소인'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피해호소인' 호칭에 앞장선 남 의원과 진선미, 고민정 의원은 지난 4·7 재보궐선거 직전 피해자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인 사과 등을 요구하고 나선 뒤에야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하차했다. 그 후에도 이들은 박 후보 선거운동을 하는 사진을 개인 SNS 등에 올려 N차 가해 논란을 일으켰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 전 시장의 사건을 수임한 법무법인 부산의 정재성 변호사는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김영춘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당초 보선 전으로 예정돼있던 오 전 시장 사건의 재판은 오 전 시장 측 요청으로 보선 이후로 연기되기도 했다. 당시 야당은 '2차 가해가 부산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오 전 시장의 피해자 A씨는 윤 위원장의 '방명록 사과'에 "저는 현충원에 안장된 순국선열이 아니다. 대체 왜 현충원에서 사과하시냐"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달 민주당 중앙당에 사건 무마, 협박, 개인정보 유출 등 2차 가해자인 민주당 인사들의 사과와 당 차원의 조치를 요청했다"고 했다. A씨는 김태년 전 당 대표 직무대행 명의의 회신문을 통해 철저한 조사와 재발 방지조치와 결과에 대한 통보를 약속 받았지만 감감무소식이라고도 전했다.

윤 비대위원장은 현충원 참배 당시 당초 예정돼 있지 않던 '무릎 꿇기'도 했다. 계획에도 없던 퍼포먼스는 마치 대단한 반성을 하는 것 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고선 방명록에 "민심(民心)을 받들어 민생(民生)을 살피겠다"고 썼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윤 위원장의 행동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피해자들이 납득하지 않은 가해 집단의 반성 표명을 진정한 반성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반성을 가장한 쇼는 피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가해행위다. 윤 위원장은 또 다른 'N차 가해'를 자행했다는 비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

무릎을 꿇어 반성할 생각이었으면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앞에서 꿇었어야 한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상처받은 하나의 민심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데, 민생을 살핀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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