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스노비시 / 김영준

한겨레 2021. 4. 23.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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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여정씨가 2021년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수상자로 지목된 순간 윤씨는 매우 놀란 듯했지만 곧 간결하고 요령 있는 영어로, "특히 고상한 체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아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기습을 당한 영국인들은 웃느라 숨이 막힌 듯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한테도 스미스라는 성을 가진 조카가 있답니다." 애스퀴스, 캐번디시 같은 성과는 달리, 스미스처럼 소박한 성은 귀족과 별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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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귀족학교에 다니며 교복 정장을 갖춰 입은 상류층의 아이들(왼쪽 두명)과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이 대비되는 1930년대 영국의 풍경. 사진 제목은 ‘토프스 앤드 터프스’(Toffs and Toughs, 1937). 위키피디아

김영준 ㅣ 열린책들 편집이사

배우 윤여정씨가 2021년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수상자로 지목된 순간 윤씨는 매우 놀란 듯했지만 곧 간결하고 요령 있는 영어로, “특히 고상한 체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인정받아 기쁘다”고 소감을 말했다. 기습을 당한 영국인들은 웃느라 숨이 막힌 듯했다. 특히 사회자는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웃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여기서 ‘고상한 체’로 번역된 단어 “스노비시”(snobbish)는 출판물에서는 대개 ‘속물적’으로 번역되곤 한다. 고상한 체하는 것은 속물의 주요 특성 중 하나지만 속물의 뜻이 범위가 넓은 건 사실이다.

배우 윤여정이 1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홀에서 비대면으로 개최된 제74회 영국 아카데미(BAFTA)상 시상식에서 영화 \

속물적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는 세가지쯤 된다. 하나는 앞에 나온 스노비시.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게 영국식 속물주의이다. 둘째는 필리스틴(philistine)인데 문화 예술 등 정신적인 분야에 대해 무지하며 그런 무식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태도를 말한다. 나중에 이런 사람이 남이 좋다고 하는 건 덮어놓고 추종하기도 한다. 이게 미국식 속물주의이다. 셋째는 머티리얼리스트(materialist). 오직 돈밖에 모르는 태도를 뜻한다. 이건 딱히 국적을 가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일상 어법에서 속물은 ‘출세주의자’, ‘아닌 척하지만 돈을 밝히는 자’ 정도의 뜻인 듯하다. 앞에서 둘째와 셋째에 걸쳐진 의미다.

한 세기 전,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의 할아버지 시대의 일이다. 어느 공작부인이 자기 아들이 신분이 낮은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왕비에게 알리면서 송구해하자 왕비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한테도 스미스라는 성을 가진 조카가 있답니다.” 애스퀴스, 캐번디시 같은 성과는 달리, 스미스처럼 소박한 성은 귀족과 별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왕비가 스미스를 외계인 취급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이런 대사를 들으면 첫번째의 스노비시한 속물주의를 우리가 경험할 일이 얼마나 자주 있을까 싶다. 영국식 속물주의는 서로 별개의 우주에 사는 고착된 계급 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스미스 대신에 대학 이름을 집어넣으면 이해가 쉽다. 우리도 이런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느낌이 든다.

영국 작가 앨런 실리토의 소설 <장거리 주자의 고독>(1959)에는 스미스라는 이름의 노동자 계급 소년이 등장한다. 절도죄로 감화원에 들어간 그는 바로 눈에 띈다. 육상에 비상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원장은 곧 있을 지역 경기에서 그가 우승하면 출소 때까지 특별대우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소년은 승낙한다. 그러나 시합 날 소년은 여유 있게 1위로 달리다가 결승점 몇미터 앞에서 보란 듯이 일부러 진다. 망신을 당한 원장은 불같이 화를 내지만, 소년은 처음부터 원장의 뜻에 따를 마음이 없었다. 안락함 대신 자존심을 택한 소년의 선택은 윤리적이다. 그런데 그 윤리는 전쟁 포로의 윤리에 가깝다. ‘앵그리영맨’ 시대에 발표된 이 소설은 계급이 고착된 사회에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해준다.

영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어떨까. ‘아직 그 정도는 아닐’까?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낮아지기는 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수석을 하고, 월급 생활자가 아파트를 꿈꾸던 정도의 사회도 이제는 불가능한 목표로 느껴진다. 개천에서 가재처럼 살라든지, 헛된 욕망에 따라 투표하지 말라는 엄숙한 충고에도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발화자들의 제로에 가까운 계급 감수성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자국민을 상대로 왕비처럼 말할 권리를 준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말에 예민해질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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