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백신의 봄
황주리 화가
사상도 이념도 모두 변하는데
우리의 정치는 왜 진화 못할까
K-방역 최고라던 자부심 무색
백신 접종률 OECD 35위 그쳐
내 차례는 언제일까 초조하고
허무한 마음에 봄마저 빼앗겨
언젠가 근대문화가 살아 있는 대구 옛 골목을 거닐며 벽에 씌어 있는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본 순간 ‘시는 참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전문을 천천히 다 읽었다. 그 제목 하나로 더 이상 다른 구절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시는 빼앗긴 들을 되찾은 지 76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시구 중의 하나다. 시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해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로 끝이 난다. 이 좋은 세상에 코로나19로 봄을 빼앗길 줄 누가 알았을까?
김기림 시인의 산문 속 이런 문구도 겹쳐 떠오른다. ‘다음 봄에는 반드시 속지 않으리라고 마음에 굳게 맹세한다. 그러고는 그런 대신 변하지 않은 영구한 봄의 설계를 또 계속해본다.’ 봄을 애타게 기다리던 애국 시인들이 작금의 상황을 보신다면 뭐라고 한마디 단단히 하실 것만 같다. 해마다 봄날은 오고 봄날은 간다. 살 만큼 살았다 싶기도 하고 아직은 살날이 많이 남았다 싶기도 하다. 해마다 봄은 꽃으로 만발해도 우리가 기다리던 봄은 늘 오지 않았던 것일까? 하긴 우리는 계속 하루가 다르게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경험해 왔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외국의 영화관은 하나도 없었다. 코리아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국영화가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쓸고 이젠 미국이나 유럽 남미 세상 어디를 가도 K-팝을 따라 부르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한국 전자기계와 휴대전화 등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세상, 오래전에 유학 생활을 해본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김치를 차이니즈 김치라고 써 붙여 팔던 1980년대, 한국의 위상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아무래도 ‘88올림픽’ 전후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진화한다. 세상은 발 빠르게 변하고 예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사상도 이념도 진화한다. 가구도 디저트도 펜션도 눈부시게 진화한다.
그런데 유독 우리의 정치는 왜 진화하지 못하는 걸까?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 모더나, 얀센 등 말로만 듣던 백신 제조사들의 이름은 내게 태풍이나 별들의 이름처럼 신비롭고 낯설다. 백신뿐 아니라 암호화폐 같은 말만 들어도 달나라의 화폐 단위를 듣는 듯 생소하다. 이렇게 상상하지도 못한 이상한 세월을 살아보긴 처음이다. 하긴 전쟁을 겪지 않은 것만도 축복이라 생각하며 사는 게 옳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K-방역이 최고라고 온 국민이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한국의 백신 접종률이 OECD 회원국 중 35위라는 뉴스를 들으며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다. 오는가 하면 가버리는 봄날처럼 요즘 세상 그 어느 것의 가치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촛불혁명을 외치며 나라다운 나라가 올 거라고 대환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게 나라냐고 아우성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늘 잊지 못하는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어느 날 학급회의 시간에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반장을 맡고 있던 나를 가리키며 “반장이 너무 무능합니다”라고 소리쳤다. 원해서 반장이 된 것도 아닌 터라 그날 밤 이 지구별을 떠나고 싶었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남의 무능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늘 궁금하다.
불후의 명곡보다 동물의 왕국을 좋아하는 나는 텔레비전마다 다투듯 현대판 노래자랑을 방영하는 걸 보면서 종일 스포츠만 방송하는 듯하던 1980년대를 떠올린다. 옛날 생각을 하며 강남보다 강북의 길 걷기를 좋아한다. 구시가지의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에서 아이쇼핑을 즐기기도 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우상인 롯데는 옛 시절의 문화 코드였을 것이다. 지금도 남대문에 가면 ‘신태양 카메라’라는 오래된 카메라 가게가 있다. 1960년대 널리 알려진 출판사였던, 우리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신태양사’에서 발간된 잡지 이름이 ‘신태양’이었다.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어릴 적에 내가 꿈꾸었던 신세계는,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들고 다니면서 받을 수 있는 지금의 휴대전화와 밤새도록 방영하는 케이블 텔레비전이었다. 청소도 음식도 캔버스에 밑칠도 해주는 인공지능(AI) 친구 로봇도 어느 날 일반화할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경험과 성공, 실패의 정보를 내재화한 고도로 지능화된 AI 지도자를 추대할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깜짝 놀랄 새로운 문명의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 그러면서 외국에 사는 친지들과 이미 백신을 2차까지 접종했다는 카톡을 주고받으며 ‘나는 언제 맞나’ 하는 초조함이 생긴다. 아주 먼 미래라고 상상하던 2021년 봄인데, 겨우 백신이라니 하는 허무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편리한 문명의 저편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어둠의 정체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 어둠이 지진일지 기상이변일지, 더 힘이 센 바이러스일지 눈앞의 일도 예상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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