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찬란한 베네치아에서 비발디를 추억하며

2021. 4. 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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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을 영어와 독일어로 April, 프랑스어로 avril, 이탈리아어로 aprile라고 한다. 일년 열두 달의 이름은 원래 영어가 아니라 기원전 8세기 로마에서 만든 것이다. 4월을 고대 로마인들은 아프릴리스(Aprilis)라고 했다. 이는 원래 ‘열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만물이 소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고 보니 기독교에서 부활절도 4월이다. 4월은 찬란한 봄빛이 가득한 달이다. 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악은 단연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다. ‘비발디’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도시는 단연 베네치아이다.

봄 아침 빛의 베네치아 바다.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에서는 운하와 아드리아 해에 반사되는 남국의 밝은 햇빛, 물 위에 가볍게 떠 있는 듯한 석조건물들과 축제의 장식처럼 아름다운 창문들, 세련되고 우아한 도제(Doge, 베네치아의 최고통치자)의 궁전, 이국적 정취가 넘쳐흐르는 산 마르코 대성당 등이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발디가 태어난 것은 1678년 3월 4일. 그러니까 어둠과 그늘 속에도 봄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베네치아에서 비발디와 관련 있는 장소로 먼저 ‘비발디 성당’(Chiesa di Vivaldi)으로도 알려진 키에자 델라 피에타(Chiesa della Pietà)를 꼽을 수 있겠다. 이탈리아어 ‘피에타’(Pietà)는 ‘자비’, ‘불쌍히 여김’이란 뜻이다. 이 성당에서는 비발디의 음악이 자주 연주된다.

이 성당 바로 옆에는 현재 메트로폴 호텔이 있는데 그 자리에는 원래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à)가 있었다. 오스페달레(ospedale)는 ‘병원’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고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던 종교기관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음악적 소질이 있는 고아 소녀들에게 음악을 전문적으로 가르쳤다.

바다에서 본 비발디 성당(왼쪽).

비발디는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뛰어나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버지와 함께 연주하기도 했는데, 이 ‘부자(父子) 듀엣’은 당시 ‘베네치아의 관광상품’으로 여겨질 정도로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성장한 비발디는 일찌감치 종교에 입문하여 25세에는 신부서품을 받았는데 머리 색깔 때문에 ‘붉은 머리의 신부님’으로 불렸다. 하지만 성직이 그에게 잘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1703년 9월부터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작곡가뿐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 후 1715년에는 베네치아를 떠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활동했는데 그의 대표작인 <사계>는 그의 고향 베네치아가 아니라 만토바에서 체류하던 1716년에서 1717년 사이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네치아의 심장 산 마르코 광장과 대성당.
그 후 그는 베네치아로 돌아와 1723년부터 공식적으로 1740년까지 다시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에서 활동하면서도 종종 자리를 비우고 여러 곳으로 전전했다. 어쨌든 두 차례에 걸쳐 약 30년 동안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에서 활동하면서 비발디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것은 고아소녀들이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노래솜씨도 뛰어났으며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했기 때문이었다. 비발디 작품 상당수는 바로 이곳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그가 지휘하는 이곳 고아소녀 오케스트라와 합창은 워낙 뛰어나서 그들의 연주를 들으러 베네치아를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면서 그의 음악은 서서히 잊혀지고 그의 명성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를 완전히 떠나 유럽의 여러 주요도시를 전전하며 지휘와 연주를 하고, 또 악보를 팔며 생활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향했는데 그에게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는 황제 카를 6세의 후원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비엔나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는 급서하고 말았다. 비발디는 일정한 수입 없이 빈곤하게 살다가 원인모를 이유로 1741년 7월 28일 63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았고 그가 묻혔던 빈민 공동묘지는 나중에 비엔나 도시개발 중에 없어지고 말았다. 올해는 그의 서거 280년 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다.
비발디 성당과 메트로폴 호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1761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 바로 옆에 새로운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이 바로 키에자 델라 피에타, 일명 ‘비발디 성당’이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19세기 후반에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는 호텔로 개축되었다.

그 사이 비발디와 그의 음악은 망각 속에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그러다가 1926년에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잊혀졌던 비발디의 악보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사계>도 있었다. <사계>는 모두 12개의 협주곡으로 이루어진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Op. 8’의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협주곡이다. 이 네 개의 협주곡은 각각 모두 빠름-느림-빠름의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테마에 맞게 독주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음악이 펼쳐진다. 
 
이후 비발디의 작품은 본격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 <사계>가 전 세계의 음악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비발디는 실로 사후 200여년 만에 부활, 그야말로 찬란한 봄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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