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변하지않는 것은 없다. 절도, 스님도

한겨레 2021. 4. 2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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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사진 조계종 누리집 갈무리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눈도 없고 색도 없다’. 시각작용과 시각대상, 그로 인한 인식작용이 고정불변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가령 유년에 보았던 작은 풀꽃과 노년에 보는 작은 풀꽃이 다르게 보이듯 말이다. 살아가면서 느낀다. 마음의 눈을 열고 보니 사람들이 그저 던지는 평범한 말 한마디도 이제는 깨달음의 법문으로 들릴 때가 있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삶의 경험과 사유가 변하면 전과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린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식의 영역에서 늘 새로이 해석되고 구성된다. 마음의 변화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지만, 대상과 풍속의 변화에 따라 인식도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이제 절집의 모습과 풍속도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절집의 풍경과 스님들을 보는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이 예전과 달라졌는지를 살펴보자.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님들의 신발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가 급속도로 번지던 초기에, 어느 누가 산사의 댓돌에 놓인 흰 고무신 사진을 인터넷으로 전했다. 그러고 스님들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백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지금은 맞지 않다. 산사에서 이제는 흰 고무신을 거의 신지 않는다. 보는 이에게 흰 고무신은 소박하고 정겹겠지만 신발을 신는 당사자들은 사실 불편하다. 나도 고무신을 신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변한 게 또 있다. 스님들이 등에 메는 걸망이다. 흰 고무신을 신고 밀짚 모자를 쓰고 풀먹인 무명 천으로 만든 걸망을 지고 산길을 걷는 스님의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다. 그런데 이런 모습도 이제는 보기 힘들다. 대신 백팩이라 불리는 세간의 가방을 사용한다. 전통 걸망은 도시 문화에 그리 어울리지 않고 실용성의 측면에서도 그리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 불자님이 승복에 맞게 만들어준 현대적 백팩 걸망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 조계종 누리집 갈무리

예전에는 각 절마다 나그네 스님들을 위해 한 두 개 정도의 객실이 있었다. 이제는 그도 없다. 대중교통의 발달과 개인 승용차가 늘어나면서 숙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속도와 효율을 중시한다. 그래서 스님들도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있다. 또 불공과 기도, 49재 등 의식과 의례가 간소화 되고 시간이 대폭 단축 되었다. 의식을 오래 하면 오히려 불자들이 견디지를 못한다. 전통 녹차가 주류를 이루던 지대방에도 원두 커피가 득세하고 있다. 예전에는 ‘차 한 잔 하시지요’ 라고 권했는데, 요즘은 ‘커피 한 잔 하시지요’라고 인사말을 건넬 정도다. 이런 현상을 굳이 ‘세속화’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면 세속화란 자본과 권력의 오염,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변화라고 말해야 옳다. 이런 변화는 불자들이나 일반인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간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문화가 절집에 새로이 생겼다. 그것은 스님들과 세속 가족의 관계다. 스님들이 가족과의 교류와 소통이 옛날에 비해 비교적 활발하다는 뜻이다. 그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 스님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인연 있는 스님들이 장례식장에 조문을 온다. 언제부터 불교계 신문 인터넷 판에는 이런 단신 기사도 실린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00스님 부친 사망, 영결식 모월 모일 모시, 00 장례식장’ 나도 이러저런 인연 때문에 스님들 가족 장례식장에 가서 염불기도를 올린다. 대체적으로 좋은 모습이다. 가족들도 위로를 받고 지인들은 부러워하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님들은 세속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수행자가 되면 세속의 부모 형제 친구와 이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한시적 이별이 아닌 영원한 ‘절연’(絶緣)이라고 단정한다. 세간의 사람들이 그게 출가자의 당연한 문화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불교의 계율을 알아서 그렇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보고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의 출가 장면은 자못 비장하다. 사랑하는 자식이 출가하면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어머니, 자식이 보고 싶어 절에 찾아가면 자식인 스님은 멀리 피해 사라지고, 이를 알고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자식이 수행하고 큰스님이 되어 죄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도하는 어머니.

사진 장철규

나도 처음에는 그게 당연한 문화이고 규칙인 줄 알았다. 열 여섯 살, 지리산 쌍계사에서 나를 포함한 열 명의 행자들이 모여 사미계를 받았다. 사미계는 스님이 되는 예비 관문이다. 얼마 전 입적하신 고산 스님이 출가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어 열 명의 사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세상의 스승이 되는 출가자가 되니 부모 형제 등 세속의 인연을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세 번 하거라. 그러고 이후 부모는 물론 대통령에게도 절을 해서는 안 된다. ‘인정이 농후하면 도심을 헤친다’고 했으니, 부모님 보고 싶다고 집에 가지 말라.” 그 때는 그런 줄 알고 그렇게 정성스레 부모님 집을 향해 절을 올렸다. 수계식에 함께 한 보살님들은 여기저기서 훌쩍이고 눈물을 보였다. 그분들이 염주를 굴리며 연신 관셈보살, 관셈보살을 부르며 합장 기도하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세월이 흘렀다. 나이가 들고 절집 경험이 많아지면서 그런 절연의 문화가 그리 근거가 없음을 눈치챘다. 나의 은사 스님은 우리가 부모를 만나는 일을 경계하면서도 노모님을 절에 모셨다. 알고 보니 더러 속가의 부모님을 모시는 스님들이 있었다. 자녀가 주지로 있는 절에 열심히 신행을 하는 부모도 있었다.

어느 날, 부처님 생애를 읽어가다가 의심이 들었다. 싯다르타는 출가하고 6년의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고향인 카필라로 가서 부왕과 형제와 친지들을 만나고 법을 설했다.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고 공양을 올렸다. 형제와 많은 고향 사람들이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세속의 친인척들은 혈연의 인연이 있는 출가수행자들에게 의식주를 보시하고 법을 들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아니 부처님의 제자는 부처님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야 하는데, 우리는 왜 그와 반대로 하고 있나? 그래서 부처님 행적을 근거로 선배 스님들에게 물었다. “스님,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제도하라고 했는데, 부모 친척은 일체 중생이 아닌가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은 황당했다. “요놈이 분별심만 생겨가지고 입만 살아있네. 수행자가 인정이 농후하면 도심이 성글어진다는 말 못 들었니. 망상 피우지 말고 화두나 열심히 들어” 그러는 그 스님은 실은 화두도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산에 올라가 조용필의 ‘꾀꼬리’와 윤시내의 ‘열애’만 열나게 노래했다.

사진 조계종 누리집 갈무리

세월은 계속 흐른다. 시간만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습도 변하고 물정도 변한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도 변한다. 그 중에 출가자와 세간 가족과의 관계도 변하고 있다. 자녀의 출가를 권하는 부모가 갈수록 늘고 있다. 한 사람이 출가하면 구족이 승천하는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자녀가 수행자가 되기를 염원한다. 내 지인은 고등학교부터 열심히 부처님께 귀의하고 공부했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얻었다. 어린 아들에게 수시로 “출가하여 큰 스님 되십시오” 라고 말하고 기도했다. 착한 아들은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서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엄마, 나도 부처님이 좋아요. 엄마도 좋아요. 그런데 나는 연애도 해야 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해야 해요. 그러니 스님 되는 일은 힘들거 같아요.” 그러고 나서 아들은 한참 있다 이렇게 엄마을 위로했다. “엄마, 이렇게 타협 합시다. 내가 공부 열심히 하고 돈 많이 벌어 엄마에게 다 줄께요. 엄마는 그 돈으로 스님들 후원하고 절에 보시하세요.” 사람은 다 자기 살 궁리를 한다. 관셈 보살...

이제는 세간의 부모 친척이 절에 오가는 일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해마다 사미계 수계식이 열리는 직지사에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참여한다. 가족들의 얼굴이 그리 환하게 빛날 수 없다. 마치 학교 졸업식 풍경과도 같다. 꽃을 전해주고 축하 사진을 찍는다. 부모는 어엿하게 가사 장삼을 걸친 자녀에게 땅바닥에 엎드려 정성스레 절을 올린다.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보는데도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 한 켠을 적신다. 혈연(血緣)을 넘어 불연(佛緣)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의식이다. 그런 부모들의 마음은 뭉클할 것이다. 훌륭하게 키운 자식이 이제 세간 사람들에게 지혜와 사랑을 주는 스승의 길에 입문했으니 어찌 눈물이 나고 벅차지 않겠는가?

출가자가 이별해야 하는 것, 절연해야 하는 것,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건 무지와 번뇌와 집착과 탐욕이다. 출가는 절연이 아닌 새로운 인연을 맺는 길이다. 홀로도 빛나고 함께도 빛나는 그런 인연의 길이다.

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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