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美 떠난 자리, 돌아온 탈레반

정지섭 국제부 차장 2021. 4.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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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의 한 병원에서 며칠 전 폭탄 폭발로 두 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은 한 남성이 치료를 받고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난 1월에서 3월사이 민간인 희생자는 2020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29% 증가했다고 UN이 밝혔다./EPA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9·11 테러 20주기인 오는 9월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전원 철수하겠다고 밝힌 지난 14일 유엔 아프가니스탄지원단에서 민간인 희생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올해 1분기 민간인 사상자는 1783명으로 작년 동기 대비 29% 늘었으며, 여성만 보면 37%로 증가 폭이 더 컸다. 인명 살상 책임 소재를 따져보니 탈레반(43.5%) 비율이 정부군(25%)이나 친정부 세력(2%)을 압도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동안 싸워온 탈레반과 작년 2월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철군 수순에 돌입했고 9월부터 본격 협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후 6개월 동안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는 전년 동기 대비 38%나 폭증했다. 평화 협상 기간 정세가 오히려 더욱 나빠진 것이다. 데보라 리용 유엔 아프간 특별대표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죽거나 불구가 되는 여성·어린이의 숫자가 충격적이다. 각 정파가 당장 폭력을 멈추길 애원한다”고 말했다. 이 호소는 같은 날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전쟁을 끝내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철군 발표 연설에 묻혔다.

미군이 빠져나간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정착할 수 있을까. 평화 협정 당사자인 미국조차 가능성을 낮게 본다. 백악관 철군 발표 닷새 전 미 국가안보국이 발간한 국제 안보 보고서 아프가니스탄 편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미군 철군이 이뤄지면, 탈레반은 세력을 확장하고, 아프간 정부군이 막아내기 역부족일 것이다. 탈레반은 군사적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자신한다.”

철군 발표 엿새 뒤 하원 청문회장에 나온 프랭크 매켄지 미 중부군 사령관은 “(평화협정 상대로서) 탈레반을 신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프간 국토 60%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19%는 완전 장악한 탈레반이 민주적으로 들어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본 것이다.

탈레반이 어떤 집단인가. 1996년 집권 뒤 여성들에게 전신·얼굴 가리개 부르카를 강제로 씌우며 가혹하게 탄압했고, 2000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바미안 석불을 우상이라며 폭파해버린 이슬람 극렬주의 단체다. 2007년 기독교 선교단 일행을 납치하고 일부를 살해한 샘물교회 사건으로 한국인에게도 충격을 줬다. 축출 후 지난 20년간 이들은 극단성을 버리고 온건 정치 세력으로 거듭났을까. 자국민을 무차별 살상하고 있는 최신 통계 수치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함을 보여준다.

자우딘 아르야인자드 아프간 하원의원은 철군 결정을 내린 미국에 대해 발언하다 “그들도 자국민을 책임져야 한다. 아프간인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힘든 걸 알았으니 떠나기로 결정한 거겠지”라고 체념했다. 돌아온 탈레반과 마주해야 하는 아프간인들의 처지는 인류사 숱하게 반복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을 갖지 못하면 결국 강력한 폭력집단의 희생자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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