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칼럼] 청년 자유주의 vs 586 반자유주의 민주화

입력 2021. 4. 23. 00:45 수정 2021. 4. 23.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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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궐 선거는 청년들의 586 심판
청년 자유주의와 586 문화의 충돌
청년들이 원하는 건 공정한 기회
국가와 권력은 공정한가 묻고 있어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어느 부지런한 정치학자의 집계에 따르면 세상에는 500여 가지의 민주주의가 있다고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누구나 민주주의의 거룩한 이름을 앞세워 저마다의 이해관계, 이상, 정념을 담고 싶어 하기 때문이리라.

지난 4·7 재보궐 선거는 두 개의 이질적인 민주주의 관념이 정면충돌한 사건이었다. 2030 청년들의 자유민주주의가 586 정치계급의 반(反)자유민주주의를 심판한 것이 재보궐 선거결과의 요체라고 말하고 싶다. 서울의 경우 20대, 30대 유권자의 55~56%가 제1야당 후보를 지지한 반면 여당 후보에 대한 지지는 34~38%에 머물렀다.(방송 3사 출구조사)

여당 586들이 예전에 거리에서 독재 권력을 향해 돌을 던졌다면, 오늘의 청년들은 투표지로 만든 종이 돌 수십만 개를 투표함에 던져 넣어 여당을 심판하였다. 개인의 자유, 자유의 필수 요건인 공정한 기회, 법 앞의 평등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믿는 청년들은 이 가치들을 외면하는 여당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듯하다.

586 정치계급과 평범한 청년 자유주의자들의 충돌은 짧아도 내년 대선까지는 이어질 터이므로 이 충돌의 ⓛ배경 ②양상 ③전망을 살펴보자.

한때 민주화 운동의 전위였던 586 정치계급의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반자유주의적인 까닭부터 돌아보자. 그래야만 우리는 청년들의 586에 대한 분노와 이질감을 다소라도 이해할 수 있다.

시계를 잠시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로 돌려보면, 당시 젊은 86들의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반독재 투쟁은 분명 영웅적이었다. 문제는 이들을 지배한 사고와 행동의 단위는 진영, 계급, 민족과 같은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진영을 옹위하는 논리, 운동 논리 앞에서 개인의 개성과 자유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그 시절 젊은 86들은 같은 말투를 썼으며 모두 같은 책들을 읽었다. (한국 민주화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반자유주의를 체계적으로 지목한 이는 학자 시절의 이홍구 전 총리였다.)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586들이 권력을 장악한 지난 수년 동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개인과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쏟아내는 결과로 이어져왔다. 의회 다수가 결심하기만 하면 개인들 간의 아파트 매매 거래도 얼마든지 제한되고 관청 허가를 받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자유 중의 자유라는 ‘표현의 자유’마저도, 얼마간 논란거리가 된다면 법으로 재갈을 물리는 사태가 이어져왔다. 대북전단금지법에서 보듯이.

18세기 후반 미국과 서유럽에서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 싹틀 때부터 이론가들의 최대 근심거리는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반자유주의 성향이었다. 선출 권력이 다수의 지배라는 절대반지를 휘두를 때, 전(前)근대 국가, 귀족의 압제로부터 겨우 해방된 개인들이 다시금 다수의 폭주 아래 신음하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 제퍼슨과 J. S. 밀의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 앞의 평등, 권력의 분립, 불편부당한 사법권이 사활적인 요건이라고 보았다. 이들 자유 보호 원리들과 결합될 때에만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하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우려는 요즘 전세계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개인을 보호하는 보루로서의 법치는 지난 수년간 한국뿐 아니라 헝가리, 터키, 브라질, 트럼프의 미국 등에서 크게 흔들려왔다.

반자유민주주의의 지구적 확산을 우려하는 학자들의 분석은 어쩌면 지식인들의 한가한 이야기일 뿐이다. 반자유민주주의와 정책의 쓰나미 앞에서 실제 삶의 위협을 온 몸으로 겪는 이들은 2030 청년 자유주의자들이다.

날로 심해지는 개인 경쟁과 불평등의 격류 속에서 성장해온 청년들은 가족, 직장, 국가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부모가 중상층 지위를 물려주기에 여념이 없는 상위 10%를 빼고 말하자.) 믿을 것은 스스로 타고난 재능과 노력, 행운뿐이다. 청년들은 깊은 불평등의 바다 속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자유라는 해안을 향해 힘차게 헤엄쳐 갈 뿐이다. 생존의 거친 바다를 헤쳐 가는 이들 청춘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힘과 경쟁의 공정함을 보장하는 규칙의 엄정함뿐이다.

지난 4월 7일 청년 자유주의자들이 여당 후보들에게 종이돌을 던진 가장 큰 이유는 586 정치계급들이 청년들의 생명과도 같은 공정 규칙을 훼손하거나 방치해왔기 때문이다. LH 정규직들의 부정축재 스캔들,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사태, 평창올림픽 출전자격 논란 등에서 청년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생명줄인 공정 경쟁의 틀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내년 봄 대선까지 586 정치계급은 공공 주택을 필두로 한 공공 시리즈를 내밀며 청년들의 상처 난 마음을 달래보려 할 것이다. 야당은 그동안 스스로 해낸 적이 별로 없는 ‘공정 사회’를 영혼 없이 외쳐댈 것이다. 고독하고 피곤한 청년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이 약속하는 공공 시리즈, 공정사회는 달콤하면서도 허탈한 유혹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계속 물을 것이다. 유혹을 내미는 국가는, 권력은, 그들은, 과연 공정한가?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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