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광해군에 양위" 15번 남발, 신하들 충성 맹세 끌어내

입력 2021. 4. 23. 00:27 수정 2021. 4. 23.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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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개성→평양→의주 잇단 파천
"왕 물려주겠다" 무너진 민심 달래
말뿐인 꼼수, 권력 끝까지 놓지않아
광해군 시절 정치적 비극 잉태해
임진왜란으로 민심을 잃은 선조는 세자 광해에게 조정의 권한을 일부 넘긴다.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조의 선언에 광해는 석고대죄를 하며 용서를 빈다. 영화 ‘대립군’(2017)에서 광해로 나오는 여진구(오른쪽)와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먹고 사는 대립군의 수장(이정 재) 모습이다. 선조는 한양 경복궁을 떠나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굴욕의 피란길에 오른다. [중앙포토]

임진왜란을 맞아 서울을 버리고 파천 길에 올랐던 선조의 하루하루는 고단했다. 그가 의주에 머물고 있던 음력 1592년 10월, 어떤 사람이 상소했다. “전하께서 인심을 잃어 오늘의 화가 생겼는데 왜 빨리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시지 않습니까. 일찍이 조금이라도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더라면 왜적을 평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곧이어 유학(幼學) 남이순(南以順) 등도 백성들의 뜻이라며 세자 광해군에게 보위를 넘기고 물러날 것을 촉구했다.

선조가 민심을 잃어 빚어진 사태이므로 스스로 물러나야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선조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조 국가에서 신민(臣民)이 임금에게 사퇴하라고 공공연히 요구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평상시였다면 곧바로 붙잡아다가 목을 칠 수도 있는 불충(不忠)이자 대역부도(大逆不道) 행위였다.

“나라 사수하겠다” 헛된 약속 내걸어

경복궁 광화문. [중앙포토]

선조의 굴욕은 같은 해 4월 28일 무렵부터 시작됐다. 북상해 오는 일본군을 저지할 것으로 믿었던 장수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은 달아나고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도 작동하지 않았다. 4월 30일 새벽, 선조가 경복궁을 나설 때 그를 따르는 수행원은 채 100명도 되지 않았다. 나라가 곧 망할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신료들은 자신과 가족부터 챙기려 했다.

5월 2일, 선조는 개성의 남대문에 거둥하여 부로(父老)들에게 더 이상 북쪽으로 가지 않고 개성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즉석에서 백성들의 민원(民願)을 청취하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해 주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감격한 백성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선조 일행은 5월 3일 한밤중에 개성에서 출발했다. 개성을 사수하겠다는 공약은 불과 하루 만에 공약(空約)이 되고 만다.

개성 남대문. [연합뉴스]

평양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6월 2일 선조는 평양의 함구문(含毬門)에 거둥하여 부로와 군민들에게 “그대들과 함께 평양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백성들에게 애로 사항을 묻고 문제점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각도의 근왕병들이 평양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선조와 백성들의 만남 장면을 목도했던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임진강 방어선이 뚫리고 일본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백성들과 약속한 대로 평양을 사수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북쪽으로 피신할 것인가를 놓고 선조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6월 10일 선조는 중전(中殿)을 먼저 함흥으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한다. 중전 일행이 평양을 빠져나가려는 기미를 보이자 군민들이 들고일어난다. 흥분한 군민들은 중전의 시녀를 몽둥이로 때려 말에서 떨어뜨리고 호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을 집단으로 구타했다. 난민들은 이어 선조 일행이 평양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시위를 벌였다. 평안감사 송언신(宋彦愼)이 병력을 동원하여 난민 두어 명을 참수한 뒤에야 선조는 북쪽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자기반성 없이 신하들 분열만 탓해

평양 보통문. [연합뉴스]

선조가 다시 공약을 어기고 평양을 떠나면서부터 평안도 일원의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선조와 수행원들이 자기 고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수령과 아전들은 종적을 감춰 버렸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선조 일행을 추격하여 일본군이 몰려오는 것이 겁났기 때문이었다. 또 백성들 입장에서는 왕과 고위 신료들이 자신의 고을로 들어오는 것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던 그들이 평안도의 변방 산골로 들어와서 자신들에게 어떤 민폐를 끼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 일행이 의주로 향하던 도중 지나야 했던 숙천(肅川)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어떤 자가 관아의 기둥에 ‘선조 일행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갔다’고 써놓은 것이다. 강계 방향에 사는 백성이 선조의 행선지를 일본군에게 알려주기 위해 했던 낙서였다. 평양을 떠난 순간부터 선조 일행은 대다수 평안도 주민들에게 그야말로 불청객인 셈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쫓겨간 선조가 1593년 9월에 내린 한글 교서(보물 제951호). 왜군에 포로로 잡혀 협조하던 조선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회유하는 내용이다. [중앙포토]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 오는 데다 민심마저 등을 돌린 암울한 상황에서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귀순하겠다고 고집했다. 신료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선조는 1592년 6월, 광해군에게 분조(分朝·일종의 임시정부)를 이끌라고 지시한다. 자신의 인사권과 군령권을 임시로 광해군에게 넘겨준 뒤 그를 함경도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겼다.

선조는 1592년 6월 22일 의주에 도착했다. 일본군을 피해 수도와 궁궐을 버리고 끝내는 서쪽 변경까지 오게 된 선조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가 의주에서 압록강의 달을 바라보며 읊었다는 시의 한 구절이 흥미롭다.

‘국경의 달을 보며 통곡하고(慟哭關山月) / 압록강 바람에 상심하노라(傷心鴨水風) / 조정 신하들은 오늘 이후에도(朝臣今日後) / 또다시 서인 동인 따질 것인가(尙可更西東).’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기에 지존인 자신이 국경까지 내몰려 압록강의 차가운 강바람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선조가 보기에 그것은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갈라져 싸움질을 벌인 신하들 탓이었다. 그저 파천만 했을 뿐 국난 극복을 위해 이렇다 할 역할을 보여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은 보이지 않는다.

선조가 울적한 심정으로 의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과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의 활약 덕분이었다. 자연히 삼남 지방에서는 이순신과 곽재우의 명성과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분조를 이끌고 함경도로 떠난 광해군에 대한 칭찬도 자자했다. 험하고 궁벽한 오지를 힘겹게 전전하면서 병력과 군량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순신·곽재우·광해군의 활약 소식에 선조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옹색한 처지와 비교됐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유학 남이순 등으로부터 “민심을 잃었으니 빨리 물러나라”는 핀잔까지 들었던 선조가 아니던가.

선조는 곤란하고 미묘한 상황에서 회심의 ‘카드’를 빼 든다. 신료들을 불러 모아놓고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선조의 선위(禪位) 선언에 신료들은 바짝 엎드린다. “망극한 선위 방침을 당장 거둬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물러나겠다는 임금의 주장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신료로서 최악의 불충 행위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애초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기겠다고 할 때부터 선위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그런데 남이순 등이 상소한 뒤부터는 거의 몇 개월에 한 번씩 선위 선언을 남발한다.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민심을 따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주된 명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신하들이 바짝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고 만류하자 재미를 붙였던 것일까. 임진왜란 시기 선조가 선위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물경 15번이었다.

선조 비위 맞추려는 광해군의 고역

선조가 피란길에 동행한 마부에게 하사한 호성공신교서. [중앙포토]

선조가 무시로 선위하겠다고 나서면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광해군이었다. 1593년 1월 이후 선조가 물러나겠다고 할 때마다 광해군은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돗자리에 꿇어 엎드려 부왕의 심기를 다독이기 위해 빌고 또 빌었다.

선조는 1602년 인목왕후(仁穆王后)와 재혼했다. 곧이어 1606년 봄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난다. 왕세자 광해군에게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던 셈이다. 이윽고 1607년 10월, 선조는 병석에 드러눕는다. 병세가 날로 깊어지자 선조는 광해군에게 국사를 섭정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받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은 섭정 명령을 광해군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선조가 장차 왕세자를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교체할지도 모른다고 넘겨짚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 정인홍(鄭仁弘)은 상소하여 유영경을 엄벌하고 광해군에게 정사를 모두 위임하여 치료에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그러자 선조는 유영경을 처벌하기는커녕 정인홍을 귀양 보내라고 지시한다. 막상 병이 깊어져 정사를 볼 수 없는 현실을 맞이하자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15번이나 선위를 운운한 것이 권력을 지키기 위한 꼼수이자 몸부림이었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민심을 사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사수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노회함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유산은 이후 광해군 대 정치사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씨앗이 되고 말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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