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YH무역 김경숙 사망 사건, 유신정권 막 내리게 한 나비효과 [종합]

최하나 기자 2021. 4. 2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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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꼬꼬무' YH 무역 여공 김경숙 사망 사건에 대해 조명했다.

22일 밤 방송된 SBS 교양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는 장트리오(장도연,장성규, 장항준)가 봉태규 주우재 김이나와 함께 잔혹한 8월의 역사, '101호 작전, 흰 장갑의 습격'을 이야기했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신문사 사진부 박기자는 마포 거리에서 '흰 장갑'을 낀 남자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이날 새벽 '흰 장갑'들에게 피해를 입은 건 박기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집단 테러에, 무려 15명의 기자와 국회의원들, 그리고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이 끔찍한 피해를 당했다.

절은 여성들은 모두 같은 회사 직원들이었다. 사건 며칠 전 회사 앞에 폐업 공고가 붙었고, 이로 인해 직원들은 한순간에 직장을 잃게 됐다. 이 회사는 YH 무역 회사로 5년 만에 무려 400배가 넘는 성장을 일궈냈다. 직원 대부분을 비교적 저렴한 임금의 여공들로 채용해 이익을 냈다.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은 여공들은 호소문을 들고 관계부처와 방송국을 돌아다녔다. 이후 한 여성 노동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기숙사에 있던 여공들을 협박하기 위해 회사 측은 단전, 단수를 감행했다. 이에 여공들은 기숙사에서 탈출해 신민당사로 향했다. 야당이었던 신민당 의원들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청와대에서는 YH 무역 여공들을 두고 긴급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청와대 긴급 회의 결과 YH 무역 여공들을 강경 진압하기로 결정됐다. 이에 중앙정보부랑 경찰은 '101호 작전'에 돌입했다.

'흰 장갑'을 낀 위장 경찰이 사건 당일 신민당사에 들이닥쳤다. 이에 YH 무역 여공들은 마지막 결의 대회를 진행했다. 결의 대회가 끝나갈 때쯤 김경숙이 나서 연설을 펼쳤다. 남동생의 성공이 꿈이었던 김경숙은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YH 무역에서 일을 했다.

김경숙의 연설에 YH 무역 여공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고, 이를 지켜 보던 기자들과 신민당원들도 눈물을 흘렸다.

당시 신민당사에 있던 이성춘 기자는 "12시가 지나니까 조용했다. 그래서 깜빡 잠이 들었다. 갑자기 '쳐들어온다'는 소리가 들렸다"면서 사건 당일 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증언했다.

위장 경찰들이 YH 무역 여공들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휘둘렀다. YH 무역 여공들이 위장 경찰들로 인해 신민당사 밖으로 끌려나오던 때, 건물 밖에서 무언가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연설에 나섰었던 김경숙이었다.

김경숙의 추락사 이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광주에 있던 김경숙의 가족에게 형사가 찾아와 부고를 알리며 서울로 가야한다고 강요했다. 몇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심지어 서울도 아니었다. 수원의 한 여관이었다. 형사는 어떻게 김경숙이 죽었는지 설명해주지도 않고 계속해서 시간을 끌었고, 다음 날에도 여관으로 가족들을 데려갔다. 유족들이 병원에 도착한 건 이틀 만이었다. 이미 부검이 끝난 뒤였다.

김경숙의 시신은 장례식도 하지 않고 바로 화장터로 향했다. 이후 유족들에게 위로금이라며 돈 봉투가 쥐어졌다. 그날 경찰은 김경숙의 사망은 강경 진압과 연관이 없다고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경숙의 남동생은 그날 이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꼬꼬무' 카메라 앞에 선 김경숙의 동생은 "너무 대응을 못했다. 무지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송스럽다"면서 죄책감을 토로했다.

김경숙 사망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전을 선포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서 김영삼의 제명안을 건의했고,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김영삼은 의원직 제명 직후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쳤다.

이 말이 예언처럼 실현됐다. 김영삼의 제명 후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을 두고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의견이 갈렸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됐다.

[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news@tvdaily.co.kr/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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