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겸손한 공감

남상훈 2021. 4. 22.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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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본능이다.

사회와 문화가 발전한 것도 공감능력 때문이다.

"공감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마음상태다. 똑같은 상황을 체험해 보지 않고는 타자의 마음을 처절하게 이해하고 함께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공감은 달성 불가능한 과업이다.

최선을 다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공감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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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란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하는 것
권위에 차 '동정' 외치는 자에 속지 말아야
공감은 본능이다. 타인과 협력했기 때문에 인류는 진화했다. 사회와 문화가 발전한 것도 공감능력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산다. 본능인데도 그렇다. 왜 그럴까? 우리가, 우리 사회가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다. 탈진에 빠지면 공감하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갖고 있어도 심신이 지치면 타자의 마음에 닿을 수 없다. 스트레스받고 노동으로 피로가 쌓이면 공감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통 인간의 한계다.

공감능력은 유한자원이다. 공감능력을 너무 자주, 너무 많이 쓰다 보면 ‘공감 피로’에 빠진다. 타자의 아픔에 초점 맞춰 그들의 마음을 상상하며 같이 느끼다 보면 정신에너지는 금세 바닥난다. 정서적 소진현상이 일어난다. 암환자나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가족, 중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 울고 싶어도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자는 공감피로에 취약하다.

공감능력이 훼손되는 또 다른 원인은 권위다. 그 유명한 ‘밀그램 연구’가 이를 증명했다. 실험실 안에 있는 학생에게 단어를 읽게 했다. 밖에서 지켜보던 피실험자는 학생이 읽기를 잘못하면 전기충격기의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 지시를 받는다. 실제로 전기충격이 가해지지는 않았지만 피실험자가 버튼을 누르면 실험실 안의 학생은 고통스러운 ‘척’ 연기를 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피실험자는 괴로워하는 학생을 밖에서 지켜봐야 한다. 공감능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그깟 단어 좀 잘못 읽었다고 충격기의 버튼을 쉽게 누르지 못할 것이다. 사지를 뒤틀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버튼에서 손을 떼야 마땅하다. 하지만 65%의 피실험자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규칙을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 당신에게 선택권은 없다. 계속하라”는 연구자의 권위적 지시에 복종하며 전기충격을 계속 가했다. 권위가 공감이라는 자연스러운 본능마저 꺾어 버린 것이다.

정신과 의사인 내게도,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신의 고통에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놓고 나중에 ‘제대로 공감이 전달되었을까?’ 하고 왕왕 되돌아본다. “공감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마음상태다. 똑같은 상황을 체험해 보지 않고는 타자의 마음을 처절하게 이해하고 함께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공감은 달성 불가능한 과업이다. 그 누구도 자기 외의 다른 이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최선을 다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완전한 공감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함부로 공감했다고 자신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동정에 찬 언행을 해놓고 “진심으로 공감했다!”고 우기는 건 최악이다. 동정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남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자기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것이 공감이다. 그럴듯한 말로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을 보니 나는 아직 괜찮게 살고 있네’라고 우월감을 느낀다면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얄팍한 동정을 베풀어 놓고 공감한 것처럼 떠벌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타자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게 공감의 진정한 목표다. 하지만 동정하는 자는 이것을 바라지 않는다. 비탄에 빠진 타자를 공감하는 척하며 자신의 힘을 키우려 한다. 권위에 취해 공감능력은 잃어버린 채 “약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고 외치는 자에게 속지 않아야 한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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