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의 렌즈, 존재의 시간을 기억하다

노형석 2021. 4. 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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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사진이 필연적으로 함축한 시간성과 존재의 관계를 일러주는 사진전들이 펼쳐지고 있다.

훈기 어린 엽서의 필적과 이를 어루만지는 산 자의 손길이 들어가면서 사진 속 엽서는 시간성을 머금은 존재로 전화하게 된다.

이탈리아 거장 조르조 모란디(1890~1964)의 정물화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들은 건조한 정물 같지만 절묘한 색감과 배치의 조화로 엄숙하고 숭고한 시간의 무게감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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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주·김용훈·강레아 사진전 눈길
고현주 작가의 4·3 사진전 ‘기억의 목소리’에 나온 희생자의 유품 엽서 사진.

“나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1915~1980)는 평생 탐구했던 사진의 본질을 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바르트가 사진의 필연성으로 간파한 ‘존재했다’는 곧 흘러간 과거다. 그것은 생존과 죽음에 얽힌 이미지의 기억들로 사유의 가지를 뻗는다.

사진이 필연적으로 함축한 시간성과 존재의 관계를 일러주는 사진전들이 펼쳐지고 있다. 서울 서촌 류가헌에 차린 제주 출신 고현주 작가의 4·3 유품 사진전 ‘기억의 목소리’(5월2일까지), 서울 서촌 갤러리 룩스에 차려진 김용훈 작가의 사진전 ‘사계’(30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밈에 차려진 산악사진가 강레아 작가의 소나무 사진전 ‘소나무―바위에 깃들다’(5월2일까지)가 그것들이다.

고 작가의 사진전은 지난달 허은실 시인과의 공동작업으로 출간된 4·3 사건 희생자의 유품 이야기 사진집과 같은 제목을 붙였다. 작가가 책에 실은 저고리, 숟가락, 초상사진 등 희생자들과 유족의 추억이 서린 기물과 일상용품 사진 20여점을 프린트 실물로 전시장에 내걸어 후대인들의 추체험과 성찰을 이끌어낸다. 2018년부터 암 투병을 하면서 ‘기억의 목소리’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작가는 희생자 유품들을 두고 ‘사물들을 집요하게 응시한다’는 특유의 방식을 취한다. 이를 통해 망자들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고 한을 풀어내는 것이다.

유족 동생의 쭈글쭈글하고 갈라 터진 손길에 잡힌 희생자 형님의 유품 엽서 사진은 4·3으로 투영된 시간과 존재의 통절한 알레고리다. 엽서는 원래 제주에서 끌려가 대구형무소에 갇힌 형님이 가족에게 안부를 묻는 글귀를 적어 보내온 해방조선 기념물. 형의 소식이 끊기면서 엽서는 유언의 기록으로 남게 됐다. 훈기 어린 엽서의 필적과 이를 어루만지는 산 자의 손길이 들어가면서 사진 속 엽서는 시간성을 머금은 존재로 전화하게 된다. 끌려간 남편의 놋쇠숟가락과 어머니의 은반지, 고통받은 피해자의 수복 문양 새겨진 물빛 저고리 등에서도 이런 전화는 이뤄진다.

김용훈 작가의 <사계> 연작 중 일부.

김 작가의 전시는 대형 카메라와 조명을 사용하는 아날로그 촬영 기법으로 ‘시간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특유의 작업을 보여준다. 빈 병, 제철 과일, 빛과 그림자를 통해 지금의 순간을 환기하는 <사계>와 폴라로이드 필름을 활용한 <시간의 온도> 연작이 내걸렸다. 측면에서 들어온 빛과 사선 무늬를 이루며 벽면에 어울린 창틀의 그림자를 배경으로 빈 와인병과 과일 담긴 접시들이 화면을 이룬다. 이탈리아 거장 조르조 모란디(1890~1964)의 정물화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들은 건조한 정물 같지만 절묘한 색감과 배치의 조화로 엄숙하고 숭고한 시간의 무게감을 전해준다.

북한산 암벽 틈에 뿌리 박고 자란 소나무를 포착한 강레아 작가의 근작 사진.

강 작가의 사진전은 암벽에 기생하며 모진 생명력을 보여주는 소나무들의 자태를 담은 풍경 사진들 모음이다. 주로 북한산 암벽 등반 도중 매달려서 포착한 소나무들의 자태를 담았다. 암벽 틈새에 뿌리를 내린 채 수직 혹은 수평으로 가지를 내뻗은 소나무 연작들에서 작가는 안개 속에 보이는 암봉들과 한몸을 이룬 생명의 호흡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듯하다. 멀리 아파트 단지가 뒤얽힌 도회적 풍경과 대비를 이루며 ‘들숨날숨’을 같이 쉬는, 급경사면 암반 위에 솟은 외솔의 풍경이 강렬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각 전시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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