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판 같은 '평면 조각'..추상으로 담아낸 시간의 흔적 '앱스트랙트 매터스'
[경향신문]
빨래판처럼 주름진 커다란 돌판이 벽에 걸려있다. 조각이라는데 납작하다. 언뜻 마크 로스코의 색면 회화처럼 보인다. 어떤 건 고대 무덤에서 떠낸 벽화 같기도 하고, 화려한 무늬의 대리석이 떠오르는 것도 있다. 신미경이 새롭게 시도하는 ‘평면 조각’이다.
신미경은 실감나는 비누 조각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하지만 씨알콜렉티브에서 열리는 신미경 개인전 ‘앱스트랙트 매터스(Abstract Matters)’에선 비누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다.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50여 점의 신작으로 탐구한 것은 이제껏 다루지 않은 ‘추상성’이다.
작가가 찾은 새로운 소재는 제스모나이트(Jesmonite)이다. 영국에서 개발된 무독성 아크릴 레진으로, 염료나 재료를 섞어 다양한 질감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작업 결과물은 평면적인 회화처럼 보이지만, 과정은 지극히 조각적이다. 폐고무판이나 스티로폼, 유리판 위에 물감을 뿌리고, 제스모나이트에 돌가루·철가루·금박·은박 등을 섞어 여러 차례 층을 만들며 안쪽을 채워나간다. 재료가 굳으면 고무판 등 틀을 떼어낸다. 캐스팅 과정을 거쳐 마주하는 것은 우연한 효과가 강조된 추상적인 표면이다. 거푸집처럼 사용되는 오래된 고무판의 결이나 마모된 부분 혹은 일부러 부식시킨 흔적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신미경은 시간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를테면 그리스로마의 조각상과 동양의 불상·도자기 등 특정 문화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물과 예술품을 비누로 만들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시간에 따라 마모되는 역사적 유물을, 사용할수록 닳는 비누의 특성과 연결한 것이다. 한때는 숭배물이거나 일상용품이던 것이 박물관에 들어가면 ‘유물’이 되는데 주목하고, 도자기와 조각상 등을 비누로 ‘번역’해 절대적 가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번 작업 역시 연장선상에 있다. 조각을 만들어낸 틀의 흔적과 응축된 시간이 조각에 반영되는 것이다. 낡은 건물의 외벽 같은 삶의 켜를 박제하여 시간과 가치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더 나아가 형용모순 같은 ‘평면 조각’을 통해 조각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건축적인 것, 환경적인 것까지 질문을 확장한다.
참고로 무게도 묵직하다. 보통 30~40㎏에 달하고, 큰 건 성인 남자 둘이 겨우 벽에 걸었다고 한다. 틀을 잡아 떠내고 표면을 갈아내는, 노동이 수반된 수고로운 과정의 결과물이다. 재료의 성질들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반복과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만족한 결과를 낼 수 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런던 집에 틀어박히면서 구상만 하던 작업을 비로소 실행했다고 한다. 마침 “어디서 생긴지도 모를 고무판이 눈에 들어온 덕분”이었다.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급이 되는’, 그리고 고유한 언어를 가진 작가가 전혀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 것도 인상적이다. “솔직히 부담이 됐죠. 사실 하던 걸 하면 너무 편해요. 하지만 비누가 아닌 재료로 작업하려고 오랫동안 준비 해왔어요. 예술이라면 새로운 시도를 안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번 전시는 신인 작가의 마음으로 갤러리나 미술관이 아닌 공간을 택했고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야죠.” 전시는 5월29일까지.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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