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떠도는 말들'

한겨레 2021. 4. 2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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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
대중사회든 디지털 시대든, 그 새로운 사태에 젖어들기의 어려움에 보태, 일찍이 이청준이 두려워했던 ‘가위눌린 말’의 상태에, 오용과 남용, 억압과 폭력의 언어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한 칼럼의 댓글에서, 우리 편이 아닌 “당신, 군대 갔다 왔어?”라는 반공시대적 프레임의 적의를 보고 ‘1103’으로 시작하는 60년 전 졸병 군번을 외워보면서 우리가 ‘1984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싶었다.

김병익 ㅣ 문학평론가

낡은 자료 더미에서 내 옛글 하나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60년대 신어’라는 50년 넘어의 <동아일보> 전면기사(1969. 12. 20)였다. 70년대의 새로운 10년대를 맞으며 당시 기획부장으로 후일 <이승만과 김구>의 대작을 완성할 손세일 선생의 지시로, 5년차 젊은 기자였던 내가 4·19, 5·16의 혁명으로 개시된 다난한 1960년대의 역사를 휘저은 유행어를 찾아 그 뜻과 원천을 찾아본 것이다. 신문사 조사부에서 10년치 신문을 훑으며 정리한 어휘는 41개, 가나다순의 ‘어원에 비친 세태’ 풀이는 가령 이랬다. 그 첫 말 ‘구악·신악’: “5·16 전과 후의 정치적 악폐. ‘현 정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혁명 공약에서 유래한 이 신조어는 혁명 이후의 부정부패란 ‘신악’을 유발했다. 혁명 3개월 후 재건국민운동차장 이지형 장군이‘혁명정부 안의 부패 가능성 내지 그 영향’을 ‘신악’이라 경고, 신조어의 책임자로 조사받았는데 증권 파동 등 ‘4대 의혹’과 ‘3분(三粉) 폭리’의 ‘신 4대 의혹’이 터진 후 민정당 창당대회선언문(63. 5. 14)은 속성된 ‘신악’ 앞에 ‘구악’이 무색이라고 일침”.

정치, 사회, 문화 등 당대 유행어에는 ‘미니’ ‘바캉스’란 당시의 후진적 생활상을 보이면서 이제는 상용어가 되어버린 말도 있고 ‘사꾸라’ ‘우골탑’처럼 그때는 심각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말도 있는데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꼴을 ‘아·더·메·치’로 줄여 비꼰 말은 ‘너나 잘하세요’란 요즘의 말로 자리바꿈하고 ‘구악·신악’은 ‘적폐·신폐’로 바뀐 듯한데, “장도영 중장 등 ‘반혁명분자’가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혁명 주체 세력에 도전했다”는 서정순 중령의 발언에서 언급된 ‘주체세력’은 5·16군부에서 오늘날 ‘86세대’로 옮겨간 것 같다. ‘부익부 빈익빈’ ‘부정축재’ ‘정치교수’ 현상은 외려 더 심해진 듯하고 ‘비대면’ ‘거리두기’는 코로나19로 생긴 새말이며 ‘갑질’ ‘알박기’ ‘끝판왕’은 반세기 후에도 다름없이 야속한 시속을 향한 야유겠거니와, 이 시대의 심리적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내며 씹을수록 실감 나는 말은 ‘내로남불’이지 싶다. 30년 전 비평가 김주연으로부터 약어 아닌 문장으로 듣고 박장대소하며 한 칼럼에 인용한 적도 있었는데, 그 고까운 역설이 던지는 시니컬한 효과도 정치인의 때를 만난 희언(戱言)으로 회자되면서 커졌고 그 야유가 한 정당의 표상으로 지목하고 있음은 이번 재보궐선거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내 유행어 캐기가 나온 지 4년 후, 말에 대해 진지한 작가 이청준이 <떠도는 말들>을 발표했다. 전화가 오는데 잘못 온 것이거나 장난질한 것, 전화하고도 아무 말 없거나 엉뚱한 말, 혼선·오인, 헛말과 욕설이 겹치는 현상에 부닥치자 화자인 자서전 작가는 “모든 전화들이 어찌 된 심판인지 거개가 다 혼선 아니면 오접, 착각 아니면 고의에 의한 장난 전화들뿐이라는 사실”에 전율한다. 그러고는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말들을 혹사했고 배반했고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말들은 고향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렸다”는 진단에 이른다. 이미 <소문의 벽>으로 말의 자유를 잃고 있는 현실 세계의 억압을 폭로했던 이청준은 ‘언어사회학서설’이란 무거운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떠도는 말’의 연작 <자서전들 쓰십시다> <지배와 해방>으로 말을 자리잡아두기 위한 고통스러운 작업 끝에 <가위눌린 말>을 쓰게 된다. 마침 잡지에서 그 편집을 맡은 나는 ‘가위눌림’이란 노골적인 지탄으로 책이 판금될 수도 있겠다고 걱정하면서도 작가의 그 절박한 뜻은 꼭 살리고 싶었다. 고심 끝에 한문학 교수에게 의뢰해 어려운 한자어를 받아 바꾼 제목이 읽기조차 힘든 ‘몽염발성’(夢魘發聲)이었다. 이 연작소설은 순수한 언어의 세계를 추구하는 그의 또 다른 연작소설 ‘남도소리’와, 가짜와 혼란이 지배하는 ‘떠도는 말’의 대립 속에서 진실이 회복되고 참된 마음이 자리 잡아 말이 지닌 본연의 가치가 되살아나는 <다시 태어나는 말>의 세계에 이르러 완결된다. 이청준은 판소리 세계의 깊은 설움과 그 유장한 사설에서 진정한 언어의 존재론적 의미를 되찾은 것이다.

나는 조국 사태 이후 코로나19의 비상사태까지 겹치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이르는 속에서 ‘떠도는 말들’의 폭력적인 소란이 난무하는 것을 보아왔다. 인심이 그처럼 그악하지 않았던 50년 전에는 전혀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이메일, 카톡, 댓글들에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의 갖가지 디지털 언어 소통 수단과 방법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아무 통제 없이 유통되어 양과 폭이 한없이 폭발하는 전자문자들 세계는 참으로 방자하고 문란했다. 새로운 전자기기의 활용에 미숙한 나는 그 미디어들이 펼치는 세태의 말들을 알아채는 데 무력해서 ‘팬덤’ ‘턱스크’ 같은 말은 손녀에게 물어 알았고 ‘유체이탈 어법’ ‘폭망’은 한자로 뜻을 더듬으면서 우리 사회가 이미 대중적이기를 넘어 인류가 처음 겪는 ‘디지털 매스미디어’ 시대로 들어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중사회든 디지털 시대든, 그 새로운 사태에 젖어들기의 어려움에 보태, 일찍이 이청준이 두려워했던 ‘가위눌린 말’의 상태에, 오용과 남용, 억압과 폭력의 언어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한 칼럼의 댓글에서, 우리 편이 아닌 “당신, 군대 갔다 왔어?”라는 반공시대적 프레임의 적의를 보고 ‘1103’으로 시작하는 60년 전 졸병 군번을 외워보면서 우리가 ‘1984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싶었다.

정치학자 고세훈 박사는 “정치는 언어를 타락시키고 타락한 언어는 정치를 부패하게 만든다”고 그의 진지한 저서 <조지 오웰>에서 강조하고 있다. 나도 바로 오웰의 <1984년> 세계에서 진행되리라고 예고된 ‘신어’의 기획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 세계를 문학적 상상으로만 밀쳐두고 싶었었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보편화한 이제 그 ‘신어의 세계’로의 후퇴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요즘 정치인들처럼 ‘거짓말쟁이’ ‘투기꾼’ 등등 그 말을 쓴 이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언어폭력의 난장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오웰의 악몽이 그저 상상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정치가 바로 가려면(“政은 正也”) 말의 품위와 진실을 되찾아야 하고 그것은 우선 언어의 제자리 찾아주기(“말은 존재의 집”)가 정치에서 우선 수행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 시대에 먼저 찾아야 할 이 소망은 오늘의 스마트 시대에 너무 스마트한 꿈일까. 그 꿈꾸기만은 허용될 수 있기를(!), 나는 고통스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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