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피의사실공표 문제" 법원 "중대 권력형비리는 공표해야"

정희영 2021. 4. 2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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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 판결로 본 피의사실공표
노건평 "수사결과 발표로 피해" 주장에
법원 "국민이 권력형비리 알아야"
'총풍 사건' 땐 공식 자료에도 손배책임인정
전주지검 군산지청을 찾은 박범계 법무부장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수원지검의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수사를 두고 박범계 법무부장관이 연일 수사기관이 정보를 흘리는 '피의사실공표'를 하고 있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 박 장관은 22일 전주지검 군산지청을 방문하면서도 "피의사실공표 자체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며 "이제는 편가르지 않고 모두에게 공정한 룰, 제도개선을 해야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를 두고 "불리할 때만 피의사실공표를 지적한다"는 반발도 거세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 등 주기적으로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지만, 명확한 기준이 없어 논쟁이 이어지는 모양새다.

아직 사법부가 형사 사건에서 피의사실공표의 유무죄를 판단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형법 제126조는 수시담당자가 기소 전에 수사정보를 공표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등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조문대로라면 수사 단계에서의 모든 발표가 위법이 된다.

매일경제는 피의사실공표를 이유로 낸 민사소송 주요 판결문을 분석해 법원에서 피의사실공표가 위법하다고 인정한 경우와 정당하고 인정한 경우를 각각 살펴봤다. 다수 사건에서 법원은 "피의사실 공표행위의 위법성이 사라지는지(위법성 조각) 여부는 공표 내용의 공공성과 공표 필요성, 절차 형식 등을 종합적으로 참작해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특히 법원은 공표한 피의사실이 중대한 권력형 비리의 경우에는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가 '성완종 특사' 의혹 수사발표로 피해를 입었다며 낸 국가배상 소송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 2심 재판부는 2020년 2월 원고 패소 판결하며 "국민이 중대한 권력형 비리 사건을 아는 것은 정치·사회적 의사를 형성하는 등 국정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밝혔다. 또 "필요·최소한의 수사결과조차 발표하지 않으면 수사·기소권을 부여받은 국가기관으로서의 책임 방기해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1심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굳이 발표할 필요 없던 공소시효 도과 부분에 대해서도 공표했다"며 국가가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으나 2심에서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상고 각하되며 확정됐다.

내부에서 절차를 걸쳐 공식적으로 피의사실을 공표했는지 여부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수사기관의 공식 보도자료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 경우가 있는 반면, 특정 기자 개인에게 정보를 알려준 경우에도 피의사실공표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경우도 있었다.

2008년 7월 대법원은 '총풍 사건' 피의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사건에서 피의사실공표가 위법해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안기부가 1998년 10월 '판문점총격 요청사건에 대한 우리의 입장'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피의사실공표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들은 안기부가 아닌 서울지검에서 조사를 받던 시기였고,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는데도 유죄를 속단하게 할 표현을 사용해 인권을 침해했다"며 "공표 내용에 공공성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위법성이 조각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반면 '일심회 간첩단 조작' 피의사실공표 손해배상 사건에서는 수사 중이던 상황에서 김승규 전 국정원장이 기자 한 명에게 "간첩단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됐지만 피의사실공표가 인정되지 않았다.

이 사건 2심 재판부는 발언 내용이 피의사실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인터뷰 요청을 거듭 받은 끝에 말을 했다는 점 등을 들어 '공표'로 보기도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기자의 질문취지까지 의도를 파악해야 하고 보도될 내용에 대해서도 유추해 인터뷰에 응해야 한다면 추상적인 답변만을 한 사람에 대해 관여할 수 있는 영역 밖의 보도내용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지우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요리가 만들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요리재료 한가지를 제공한 사람에게 요리의 맛에 책임을 지라는 꼴이어서 부당하다"고 덧붙였다.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수사 담당자가 개인적으로 기자에게 수사정보를 알려준 한 사건에서는, 경찰 A씨가 "기자와의 개인적인 대화"라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개인적인 대화라도 상대가 취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피의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사례도 있었다.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논쟁은 결국 입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가령 형법 제307조 명예훼손죄의 경우 같은법 제310조에서 "행위가 사실이고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한 고위 법관은 "공표한 내용이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면 악의적인 행위로 보고 책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명예훼손죄처럼 적용 범위를 좁혀 놓고 그 안에서 꼼꼼히 보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고 밝혔다.

한 판사는 "피의사실공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헌법 조항을 무력화할 수 있어 가볍게 볼 죄가 아니다"면서도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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