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테루아르와 과학] '설(雪)'과 '록(綠)'에 숨은 녹차의 테루아르

2021. 4. 22.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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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설록 제주 돌송이 차밭 . [사진 제공 = 아모레퍼시픽]
와인 열풍이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최근 코로나19 때문에 와인 소비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커피나 녹차와 같은 기호 음료 소비량도 증가하는 추세다. 집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긴 일이다. 사실 소비량 측면에서 보면, 차(茶)는 전 세계에서 물 다음으로 많이 소비되고 있는 음료다. 하지만 와인이나 커피에 비하자면 고급스러운 고가 브랜드 이름이나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차(茶), 특히 제주도의 기후와 한라산 토양의 독특한 특성으로 빚어낸 차를 '테루아르(Terroir)'라는 개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테루아르는 원래 고급 와인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도입한 개념이다. 똑같은 품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수확해서 같은 방법으로 발효를 해도 왜 지역별로, 심지어 한 와이너리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만드는 와인의 품질이 크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테루아르는 땅의 지형, 기후, 식물, 토양의 특성뿐 아니라 와인을 만드는 농부의 작법과 그 과정에 얽혀 있는 문화를 통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이 개념을 커피는 물론 차에도 적용해 보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처음 '설록차'라는 브랜드 이름을 들었을 때 내게 떠오른 이미지는 고풍스러운 동아시아의 문화였다. 아마도 오래된 한시 구절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 차를 재배하는 제주도의 '돌송이 차밭'을 처음 방문한 날, 이 명칭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 덮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드넓은 초록색 밭, 즉 '설록(雪綠)'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의미뿐 아니라 이곳에서 자라는 녹차의 테루아르를 결정짓는 요소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제주도라는 화산섬 토양의 특성, 돌송이 차밭의 경사에 따른 일사량, 한라산 때문에 일어나는 낮과 밤의 일교차와 안개, 가까운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실린 염분, 그리고 유기농 비료만 사용하는 재배법 등이 이 차의 테루아르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 연구팀은 토양 안의 화학적 성질과 미생물의 특성에 대해서 연구 중이다.

보통의 식물은 중성이나 약산성의 토양에서 잘 자라는데, 차나무는 독특하게도 산성 토양이 최적의 환경이다. 제주도 차밭은 기반암이 화산암인 데다가 오랫동안 차밭에 퇴비와 유기농 비료를 가한 덕분에 pH(수소이온농도) 지수가 매우 낮다. 이러한 요소로 인해 주변과 전혀 다른 토양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돌송이 차밭 토양에는 칼륨(K) 성분이 아주 풍부한데 이는 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토양 미생물 분석 결과, 돌송이 차밭에는 유산균을 생성하는 미생물을 포함해 아주 다양하고 독특한 종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도 밝혀졌다. 이것이 '설록'을 규정하는 새로운 테루아르의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연적인 환경 외에도 차나무를 키우고 재배한 후 차를 가공하는 과정도 테루아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마치 같은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도 어머니 '손맛'을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의 '교쿠로(玉露)'와 같은 고급 녹차는 찻잎을 따기 전 햇빛을 막아주는데, 이 스트레스를 견디려고 식물들은 엽록소를 더 많이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차의 향과 맛이 더 풍부해지고 상대적으로 쓴맛은 줄어들게 된다. 또 찻잎을 따는 방법이나 덖는 방법도 테루아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제주도라는 천혜 자연의 특징과 인간의 노력이 버무려진 '설록' 테루아르의 비밀, 과학자들이 첨단의 연구 방법으로 밝혀내는 차의 과학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은 안전한 집안에서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여러 과학적 발견의 진행을 즐겨주시길 기대한다.

[강호정 연세대 공과대학·아모레퍼시픽 녹차유산균 연구센터 자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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