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지 않았다.. 대출까지 받아 '램프'를 샀다

정상혁 기자 2021. 4. 22. 03:1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장품] ⑤이광기와 백남준
백남준의‘램프’(1994) 옆에 선 배우 이광기. 경기도 파주에 차린 작업실(스튜디오끼)에 놓인 이 작품은 20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백남준·요셉보이스 2인전에서‘이광기 컬렉션’으로 소개된 바 있다. /스튜디오끼

해무(海霧)가 짙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배우 이광기(53)씨는 한 줄기 빛을 찾아다니는 중이었고, 백남준(1932~2006)의 ‘램프’를 만나게 된다. 실제 원양어선에 달려있던 램프 내부를 개조해 1994년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다. “망망대해를 건너다 보면 험난한 순간이 많을 것이다. 격랑과 어둠 속에서 램프가 길을 안내한다. 꽤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헤쳐나가야지.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의 등불이었다.”

서울 소격동의 어느 화랑에서 우연히 이 작품을 접한 2015년, 그는 은행 대출까지 받아가며 어렵사리 품에 안았다. 요샛말로 ‘영끌’이었다. 이씨는 “집도 대출받아 사는데 미술품은 왜 안되느냐”고 말했다. ‘램프’에 100볼트 전압이 닿으면 화면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온다. “사람들이 손을 뻗어 뭔가를 잡으려 하는 영상”이다. 뚜껑 바깥으로 뻗은 안테나가 세계와 송수신한다. “인생은 나만의 방향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백남준 선생님도 누가 손가락질하든 말든 자기 길을 개척한 분이다. ‘램프’에 그 정신이 담겨있다.”

백남준 1994년작 '램프'(50×25×33cm).

그가 삶의 방향을 미술로 선회한 것도 항해의 풍랑과 관련이 깊다. “2009년 신종플루로 첫째 아들 석규가 곁을 떠났다. 미친놈처럼 울었다.” 이듬해 먼 나라 아이티에 큰 지진이 덮쳤다. 아비규환의 아이들을 위해 그는 아들의 생명보험금 전액을 기부하고, 봉사 활동까지 떠났다. “아들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울렁였다. 한국에 돌아와 내 역할을 고민했다. 지진으로 건물이 다 무너졌으니 학교를 지어주자. 내가 연예인이니 나서서 돈을 모아보자.”

그가 선택한 것은 ‘자선 전시’였다. “석규도 그림을 좋아했고 평소 가족끼리 자주 전시를 보러 다니곤 했다. 미술이 주는 기쁨을 자선으로 연결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해 친분 있는 화가들에게 작품을 기부받아 치른 첫 행사에서 완판을 기록하며 1억원 정도를 모았다. 이제 전시기획자로 자리 잡은 그는 파주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유튜브 생방송 미술품 경매쇼 등을 열어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지금껏 아이티에 학교를 두 개 지었다. 내 컬렉션도 전시 기획을 하면서 더 깊어졌다.”

구사마 야요이·이우환·김창열·문형태 등 지금껏 그가 모은 작품만 200여점에 달한다. “아버지가 고물상을 운영하셨다. 집에 족자나 도자기 같은 골동품이 많았다. 뭔가를 모으는 습관이 그때 생긴 것 같다.” 2000년 드라마 ‘태조 왕건’에 출연하며 무명 생활에서 벗어났다. “당시 드라마 감독님을 따라 인사동에 다니며 그림을 구경하면서 조금씩 눈을 뜨게 됐다. 그분이 내 이름과 함께 잠들어있던 열망까지 일깨운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느 불빛이 나를 이 방향으로 인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백남준은 누구?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아트 작가로, TV와 영상을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한 선구자다. 1960년대 국제적 전위 예술 운동 ‘플럭서스’(Fluxus)를 주도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