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서정시대] 미나리, 고난을 겪어도 무너지지 않는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2021. 4. 2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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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 '미나리'가 15일(현지시간) 아카데미 여우조연, 각본, 음악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사진은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속 출연진. 왼쪽부터 스티븐 연, 앨런 S. 김, 윤여정, 한예리, 노엘 게이트 조. 2021.3.15 /연합뉴스

‘남매’라고 두 글자를 써놓고 보니, 그 음절 사이의 가깝고도 아득한 거리에, 괜스레 목이 멘다. 두 살 터울인 남매가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싸울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옛날 옛적 ‘오빠와 나’의 성장담을 들려주곤 했다. “외삼촌과 엄마는 어릴 적 친척 집에서 따로 자랐는데, 어쩌다 읍내에서 만나면 외삼촌은 아껴서 모은 용돈을 떡볶이 사먹으라고 엄마 손에 쥐여주고 달려갔단다.” 스산하고 외로운 결손가정에서 유소년의 고난을 함께 겪은 오빠와 나는, 안식 없는 세상에서 강하게 결속되었으나, 현실 남매에겐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낡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미국 영화계와 아카데미의 전폭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은 영화 ‘기생충’과 ‘미나리’를 보면서 내 눈에 깊게 박힌 건 그 안의 남매들이었다.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 반지하에 살면서도 밝고 기세 등등한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은 부잣집 남매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는 그 순간, 환상의 동업자로 파트너십을 보여준다. 계급이 다른 두 남매가 보여주는 그 리드미컬한 불협화음과 리버럴한 야심은 영화 ‘미나리’의 세계에 닿으면 저세상의 ‘해프닝’처럼 느껴진다. 폭풍 재난방송조차 잘 나오지 않는 아칸소 초원의 바퀴달린 집에 사는 앤과 데이빗 남매는 하루 종일 병아리 감별장에 나가 일하는 부모를 기다리며 지낸다.

어느 날, 시들어가는 남매 앞으로 할머니라는 기적이 날아든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윤여정은 어쩜 그렇게 다정하고 산뜻할까. 젊은 시절 이민의 고단함을 경험했던 자신의 특별한 서사와 윤여정이라는 한 개인의 사적 매력이 스며든 이 아름다운 방문객을 보며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척박한 환경에 뿌리내리려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안간힘을, 그 실수와 결핍을 비난하지 않는 특유의 천연덕스러움이라니!

농장을 일구려 했으나 수맥을 잘못 짚어 집 안의 식수를 마르게 하는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도, 제 몸의 물줄기를 다스리지 못해 밤마다 오줌을 싸는 개구쟁이 손자 데이빗도, 할머니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물이 안 나오면 미나리 밭에 가서 개울물을 좀 길어오면 되고, 오줌이 새면 “딩동 브로큰!”이라고 귀엽게 놀려 먹으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불탔던 밤 이후, 달빛 아래 나란히 잠든 네 사람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엔 윤여정의 배우 인생 74년이 우물처럼 고여 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왜 문득 폭우가 몰아치던 밤, 박 사장 저택 거실 테이블 밑에서 벌레처럼 숨죽이며 나란히 누워있던 ‘기생충’의 가족들이 떠올랐을까. 왜 어떤 가족은 고난을 겪고도 파괴되지 않고, 어떤 가족은 고난 앞에서 흩어지는가. ‘기생충’에 등장하는 세 가족(박 사장네 가족, 기택네 가족, 가정부 가족)은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음습하고 변태적이고, 부정직하며, 서로를 등쳐 먹고, 끝끝내 불행의 자리에서 도망친다.

‘미나리’의 가족은 정반대 지점에 있다. 생각해보면 첫 등장부터 나는 이 가족의 생김새가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다. 아내인 모니카(한예리)를 필두로 어떻게 저렇게 감정이 습자지처럼 배어나는 깨끗한 얼굴로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을까. 서로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유랑의 지분을 나누어 갖고도 충분히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수용의 바탕에 ‘편견 없음’이 깔려있다. ‘편견 없음’이란 무엇인가. 내 자리에서 쉽게 비난하지 않으려는 자제력이며,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는 사려 깊음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영광은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이라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몸에 밴 한 노인이, 스크린 속으로 ‘스윽’ 자기 인생을 끌고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수순처럼 지금 세계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싱싱하고 웃기고 편견 없는 할머니 윤여정에게 열광하고 있다. ‘불시에 맨홀에 빠지고 천둥이 치는 게 인생이지만 닥치기 전까지는 즐겨야 한다’는 그녀의 인생 철학과 고난을 통과하고서도 파괴되지 않은 ‘한 덩어리의 핏줄’을 빨아들이는 ‘미나리’ 순자의 그 블랙홀 같은 눈빛이 만인의 가슴에 찰랑댄다.

1년 전 ‘가난의 냄새’로 전 세계인의 후각을 자극한 봉준호의 ‘기생충’이 가고 오스카 시상식장을 싱그럽게 달굴 ‘미나리’의 계절이 왔다. ‘기생충’의 도달점이 불평등이 아니라 ‘예의 없는 자들의 파국’이듯, ‘미나리’의 도달점 또한 이민 가정의 고단함이 아니라 ‘편견 없는 자들의 천국’이다.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고난을 겪었지만 파괴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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