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슬픔과 함께 잘 살기

오은 시인 2021. 4. 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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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며칠 전, 메리 루플의 산문집 <나의 사유 재산>(카라칼, 2021)을 읽었다. 노년에 접어든 여성이 쓴 마흔한 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첫 글 ‘작은 골프 연필’을 읽다가 예감했다. 이 책은 슬픔을 향해 쓰였구나, 슬픔을 위해 쓰였구나. 인간이라면 불가피하다 못해 친숙한 감정, 떨쳐내려고 몸부림쳐도 어떻게든 들고 일어나는 감정이 바로 슬픔이다. 향한다는 것은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주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단순히 매일 아침 씻고 나서 습관적으로 거울을 마주하는 일이 아니다. 주름진 이마를,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를, 몸 안팎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통증과 상실을 직면하는 일이다.

오은 시인

글 속에서 작가는 경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말에 경찰들은 만족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그들이 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려보는 일은 ‘쓰임’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경찰들은 국민을 위해 공공질서와 안녕을 보장하는 일로써 존재 이유를 찾은 셈이다.

나이듦은 (생계를 위해서든, 사명감에 불타올라서든)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종사하던 이에게 절대적 시간을 선사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지난 시절을 다 바친 사람이 그제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얄궂게도 잉여 시간은 성취에 대한 만족감보다 과거에 하지 못한 일에서 비롯한 회한이나 미련을 더 자주 소환한다. 자신이 원래 바랐던 모습과 실제로 통과한 세월 사이의 괴리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낳기도 한다. 세계를 이해하느라 자기 자신을 외면했던 시간이 뼈아프다. 나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세계는 숨 가쁘게 변화하는데, 어느 순간 나이든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해의 불일치다.

이때 나를 덮치듯 찾아오는 감정이 슬픔이다. 이 괴로움은 혈기왕성하던 시절 찾아오던 패배감과는 사뭇 다른 성질의 것이다. 순간의 실수는 아찔함을 동반하지만, 한참 동안 쉬지 않고 내달린 다음 뒤돌아볼 때는 막막함이 엄습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슬픔을 내장하고 있다. 젊음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세계도 이해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그저 커다란 세계 뒤에 숨었을 뿐이다. 나이를 먹으며 대의에 가려졌던 자디잔 감정들이 슬픔으로 뭉친다. 내가 온전히 나이지 못했던 순간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제 슬픔은 떠안는 감정이 아니라 같이 사는 감정이 된다.

다음 날 읽은 김기창의 소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민음사, 2021)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현미경 들여다보듯 차이를 말하는 사람들은 무시하라고. 대신 다른 이들의 감정을 보는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기쁘고, 슬프고, 웃기고, 아픈 것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자신의 감정을 아는 이가 남의 감정도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젊을 때는 으레 현미경으로 세계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일 앞에서 기쁨과 슬픔과 웃김과 아픔을 그러모아 나를 완성하는 일은 나중으로 밀리기만 했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실마리를 찾는 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라면, 실타래를 짓기 위해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현미경으로 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 감정을 뾰족하게 알지 않으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점점 뾰족해지기 때문이다. 뾰족해진 감정은 느닷없이 주머니를 뚫고 나와 상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서 해소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억눌린 감정이 향하는 곳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나를 이해하는 일은 슬픔과 함께 잘 살기 위한 실마리일지 모른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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