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미술판은 중원보다 변방..지역미술관 춘추전국시대
지금 대구에서는 한국 근대 양화의 최고 거장들로 꼽히는 월북 작가 이쾌대(1913~1965)와 요절 작가 이인성(1912~1950)의 뜨거운 그림 맞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무대는 지난 2월 초부터 개관 10돌 전 ‘때와 땅’(5월30일까지)이 차려진 대구미술관 1층 전시장 한가운데 있는 3섹션 ‘이인성과 이쾌대’의 방. 대구 수창보통학교 동창인 두 작가의 대표 작품들이 줄줄이 나와 서로 마주보는 구도로 차려졌다.
그림들끼리의 기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가장 흥미롭게 견주어지는 작품은 각자의 자화상과 각각 두개씩 잇따라 건 대작들이다. 먼저 자화상.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 거침없는 시선으로 붓을 들고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의 눈길이 가닿는 맞은편 벽에는 눈을 그리지 않은, 초등학교 동창 이인성의 푸석푸석한 자화상 소품이 내걸려 있다. 이 땅의 근현대 자화상 그림 가운데 눈빛이 가장 형형하고 매서운 작품으로 단연 손꼽히는 이쾌대의 자화상과 시선을 감추고 우울한 감상에 젖은 듯한 기색을 드러낸 이인성의 소품 자화상은 같은 1940년대 작품이지만,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붉은빛 땅 위에 애수를 띤 소년 소녀를 등장시킨 이인성의 1930년대 대작 <가을 어느 날>과 <경주의 산곡에서> 또한 이쾌대의 <군상> 연작들과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그 사이의 관객들에게 오묘한 감흥을 안겨준다. 이인성의 대작들이 수동적인 조선의 향토색을 드러낸다면, 이쾌대의 <군상> 연작들은 해방 이후 여러 시대적 풍파를 딛고 미래의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적극적인 군중의 이미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서로 번갈아 뜯어보면서 느껴보는 감상의 흥취가 색다르다.
이런 흥미로운 기획전이 대구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 미술판의 전시 현장은 가히 ‘지역미술관들의 춘추전국시대’라 부를 만하다. 각 지자체 미술관들이 아카이브 수집과 자료 분석에 공들여 내놓은 지역 근현대 미술사 기획전들이 올해 상반기 전시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권 국공립 미술관들의 회고전·기획전·발굴전들이 부실한 아카이브 조사나 진부하고 미숙한 전시 구성으로 뒷말에 오르는 것과 대비된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민중미술로 통칭되는 1970~90년대 한국 리얼리즘 미술사의 기본 틀을 해체하는 틀거지의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8월22일까지)전을 차렸다. 정복수, 노원희, 송주섭, 안창홍, 김은주, 정진윤, 김춘자, 권영로, 최석운 등 당대 부산 지역에서 작품 기반을 닦았거나 지금까지 현지에서 활동 중인 형상회화 중심 작가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이 기획전은 민중미술이라는 단편적 분류 아래 배제됐던 1980년대 부산 형상미술과 서울의 ‘한강미술관’파로 대별되는 경계지대의 리얼리즘 작가들을 새로 부각시켜 한국 현대 미술사를 재구성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한국 수채화단의 원조 대가였던 배동신과 1950~60년대 추상회화의 실력자였던 양수아의 대규모 회고전 ‘100년의 유산’(5월9일까지)으로 기억 바깥으로 밀려났던 두 거장을 새롭게 한국 화단사에 복권시키는 기획을 펼쳐놓았다. 산야 등의 자연과 사람의 여러 형상을 미묘한 감각이 생동하는 필선과 격정적인 색면으로 담아낸 두 대가의 드로잉·데생·습작·대작들은 여느 작가와 다른 회화적 감동을 자아낸다.
대구미술관의 전시 또한 이쾌대, 이인성 두 거장의 명품전에 머물지 않는다. 1920~50년대 국내 미술계의 중요한 거점이던 대구 미술계의 시공간들을 당대 지도와 예술인들이 오가던 건물과 거리 등의 사진들을 통합해 하나의 아카이브 섹션으로 묶어 전시한 것은 국내 초유의 성과다. 시서화는 물론 모든 분야의 예술 영역에 능해 팔능거사로 불렸던 석재 서병오의 주요 작품과 1920년대 동인 벽동사를 결성하며 대구 지역에 양화 화단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시인 이상화의 형 이상정의 서각 작품들을 처음 발굴했다. 정밀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표현적 기량을 보여주는 서진달, 박명조, 백락종 같은 지역의 실력파 작가들을 부각시킨 것도 성취라 할 만하다.
부산현대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은 실험적인 기획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을숙도에 자리한 부산현대미술관의 경우 지난해 말부터 이달 초까지 코로나 팬데믹 시대 건축공간에 대한 고민을 담은 지역 건축가들의 기획전 ‘혁명은 도시적으로’를 진행했다. 도면과 설계 모형으로 채우던 기존 건축 전시의 판에 박힌 관행을 벗어나 관객이 내부를 드나들고 엿보는 미로와 격자 구조의 대형 설치 작품들을 대거 등장시켰다는 점이 신선했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전(5월9일까지)은 삶 속에서 겪는 상실의 이야기들을 화두로 삼아, 국내외 현대미술가 10여명이 다기한 상상력으로 이를 표현한 작품 일기 형식의 전시 틀을 창안해 눈길을 끌었다.
최근 서너달 사이 두드러진 지역 미술관들의 기획전은 지난해 잇따라 부임한 전문 큐레이터 출신의 실력파 관장들이 진두지휘하면서 충실한 지역 미술사 데이터와 관점을 가지고 만들어 기본이 탄탄하다는 평을 듣는다. 전승보 광주시립미술관장은 “지난 수년 동안 지역 연구자와 미술관 학예직들이 묵묵히 축적해온 지역 작가와 미술사 현장의 아카이브 작업들이 최근 기획 역량과 만나 본격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며 “중앙 화단 못지않게 역사적 맥락과 작업의 지층들에 대한 정보를 축적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지역 미술관들이 더욱 뚜렷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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