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칼럼] 일본의 '연미반중'은 루비콘강을 넘었나?

정의길 2021. 4. 21. 15: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의길 칼럼]
대만을 고리로 한 일본의 ‘연미반중’은 아시아를 어디로 몰아넣을까? 지금 상황은 120년 전 영국이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를 견제하려다 동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것과는 정말로 다른 것인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ㅣ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지난 16일 미국과 일본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이 명기됐다. 동아시아에는 냉전 때보다도 깊은 대결의 단층선이 그어지게 됐다. 대만 문제를 건드림으로써, 미-일 동맹은 반중이라는 가치로 치닫고 있다.

1951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의거한 미-일 동맹은 현 국제질서의 토대인 17세기 유럽의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강대국 사이에 맺어진 최장기 동맹일 정도로, 이례적 항구성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 동맹의 주요 표적인 중국 문제에서 일본은 독자성을 가지려 했다.

요시다 시게루로 대표되는 전후 일본의 ‘보수 본류’는 경제 우선과 주변국 중시의 노선을 펼치려 했다. 이를 통해 주변국에 인정받는 아시아의 지도국으로 일본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일본의 안보와 번영이 결국 아시아에 달렸다고 믿은 요시다 전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존 덜레스 당시 미 국무장관은 요시다에게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면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했고 요시다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요시다는 한국전쟁 때 중국과 비공식 무역협정을 맺어, 봉쇄당한 중국의 숨통을 터줬다. 1954년에는 일본 의원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으로부터 “매일 사죄를 강요받을 수는 없지 않냐”고 과거사를 불문에 부친다는 말까지 얻어냈다. 요시다를 이은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도 중국 대표단을 초청하고, 미국이 요구하는 군사력 행사에 저항했다. 후임 총리 이시바시 단잔도 중국과의 화해로 경제 이익을 챙기고, 냉전 질서에서 한편에만 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바시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반공과 안보를 중시하는 ‘보수 방류’의 대표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되면서 이런 흐름은 뒤집어졌다. 미국은 중앙정보국까지 동원해 기시에게 정치자금을 대면서 그의 총리직을 후원했다. 기시의 일본은 사회주의권 봉쇄라는 미국 전략의 전초기지 구실을 충실히 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중-일 관계를 막아오던 미국이 1970년대 초반 전격적으로 중국과 화해하자, 미국보다 앞서 중국과의 수교와 평화우호조약 체결을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대중 관계에서만은 독자성을 보이려 했다.

2009년 하토야마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어, ‘동중국해를 우애의 바다’로 만들겠다며 미국보다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당시 ‘아시아로 귀환’ 정책을 내걸고 중국과의 대결을 시작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격렬한 외교 충돌이 빚어졌다. 그는 1년도 안 돼 실각했다. 곧 기시의 외손자 아베 신조가 총리가 되어, 일본 재무장과 평화헌법 개정을 내걸고 다시 미국의 충실한 파트너로 복귀했다.

하토야마 실각에 이은 아베의 최장수 총리직 재임은 기시 이후 시작된 보수 본류와 방류의 지위 역전을 완성한 사건이었다. 중-일 관계 악화는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개정으로 촉발된 과거사 문제가 발단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중국의 굴기와 이를 위협으로 보는 일본 정치 지형의 변화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20세기 전후 일본이 대륙 침략에 나선 최대 배경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선제대응이었고, 동맹을 맺은 영국의 후원을 받았다. 이 침략의 첫 전리물이 청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대만이었다. 대만은 중국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당한 치욕의 상징이지만, 일본에는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상징이었다. 이 때문에 대만은 전후 중-일 관계에서도 내내 문제였다. 대만파인 보수 방류는 중국파인 보수 본류의 중-일 관계 개선에 딴지를 걸었다. 그런 대만을 일본이 미국과 반중 동맹의 고리로 삼았다.

다케우치 유키오 전 일본 외교사무차관은 <아사히신문>에 “이번에 중국에 대한 의사 표명은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야나기사와 교지 전 관방부장관보는 “미국 신형 미사일의 일본 배치 논의도 있을 것”이라며 “대만 유사시에는 일본 앞이 전장이 된다. 정말로 좋은 것인지 끊임없이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번 회담에서 스가 총리가 미국 의도를 읽고 보조를 맞춰주는 데 어떤 각오를 가지고 임한 것이냐”고 물었다.

대만을 고리로 한 일본의 ‘연미반중’은 아시아를 어디로 몰아넣을까? 지금 상황은 120년 전 영국이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를 견제하려다 동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들었던 것과는 정말로 다른 것인가?

Egi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