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정교한 투각공예 고창, 나주 금동신발 보물 지정

2021. 4. 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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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21일 고창 봉덕리 1호분과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금동신발’ 2건과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을 보물로 지정 고시했다. ▶헤럴드경제 2월 16일자 보도

고창 봉덕리 1호분 출토 금동신발은 1500여 년 전 한국 고대인들의 상장례(喪葬禮) 문화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5~6세기 백제 금속공예 기술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정촌고분 금동신발 발등장식

둘 다 각각 한 쌍으로 출토된 이들 금동신발들은 모두 백제 5세기에 제작되었으며, 삼국 시대 고분 출토 금동신발 중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보기 드문 사례다. 그동안 삼국 시대 고분 출토 유물 중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국보나 보물로 상당수 지정되었지만, ‘금동신발’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까지 마한 백제권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성 요리, 원주 법천리, 공주 송산리, 공주 수촌리 등지에서 출토된 총 19점이 알려져 있다.

금동신발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 시대 유적에서만 발견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고대 금속공예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의 중국 유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일본의 고분에서는 유사한 형태의 신발이 출토된 사례가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이 지역 최고 위계의 지배집단들이 묻힌 무덤으로 추정된다. 백제 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 유래된 물품이 집중 부장되어서 국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 금동신발 발굴 모습

금동신발의 전체 형태를 보면, 발목깃을 갖추어 앞쪽은 뾰족하면서 약간 위로 들렸고, 중간 바닥이 편평하며, 뒤쪽은 약간 좁아져 둥근 편이어서 흡사 배 모양을 연상케 한다. 투각(透刻)의 육각형으로 구획된 형태 안에 용, 인면조신(人面鳥身, 사람얼굴에 새 몸통을 가진 상상의 동물), 쌍조문(雙鳥文), 괴수(怪獸, 공상의 동물), 연꽃 등 각종 문양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신발 바닥에는 1.7㎝ 높이의 뾰족한 못 18개를 규칙적으로 붙였고, 내부에는 비단 재질의 직물을 발라 마감하였다.

정촌고분 금동신발은 형태와 제작기법, 문양 등에서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신발과 매우 유사하다. 얇은 금동판 4장으로 바닥판과 좌우 옆면판, 발목깃판을 만들어 서로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고 문양을 투각해 세부를 선으로 묘사한 방식 등 고대 금속공예 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육각문, 용문, 인면조신(人面鳥身), 괴수문, 연화문 등 사후영생(死後永生)을 기원한 고대인들의 사후세계관이 반영된 듯한 다양한 문양이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조형적으로도 매우 우수하다.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은 고창 봉덕리 금동신발에 비해 조금 늦은 5세기 후반경에 제작되어 6세기 무령왕릉 출토 금동신발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단계를 보여주는 공예품으로, 5~6세기 백제의 사상과 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이번에 함께 지정된 보물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은 호남을 대표하는 고찰 백양사에서 300년 넘게 전래된 불교문화재다. 1994년 9월 도난되었으나, 2006년 9월 지금의 제자리로 환수된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본존 아미타불이 여러 제자들에게 불교의 교리를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775년(영조 51) 백양사 극락전 아미타불상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불화다.

장성 백양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본존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과 6위의 제자, 사천왕, 2위의 팔부중(불법을 수호하는 8명의 신)을 배치하였으며,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구도, 간결한 필치와 중후한 색감, 원만한 인물 표현 등 수화승(불화 제작에 참여한 화승집단을 이끈 역량이 가장 뛰어난 화승) 색민의 화풍을 잘 반영하고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 불화다. 불화의 조성시기, 참여자 명단 등을 알려주는 발원문과 복장낭(불화를 조성한 뒤 불경 등 복장품을 넣는 주머니) 등 복장유물 6건도 온전하게 잘 남아 있어 18세기 후반 불화 복장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므로, 복장유물 역시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있다.

색민(嗇敏)은 18세기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 승려로, 대형 괘불도에서부터 소규모 칠성도(七聖圖)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불화를 능숙하게 그려낸 당대 대표 수화승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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