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발신자 [오늘을 생각한다]
2021. 4. 21. 09:42
[주간경향]
지난해 3월 위성정당 창당 논의를 위한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가 열리기 전날 새벽, 한 민주당 지지 유튜버의 생방송을 4만여명의 지지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진행자는 위성정당 창당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배신자’라고 한참을 성토하더니 그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시청자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응징하겠다고 지령에 화답했다. 배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의원들은 이날 이후 약속이나 한 듯 위성정당 문제에 입을 닫았다.
지난해 3월 위성정당 창당 논의를 위한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가 열리기 전날 새벽, 한 민주당 지지 유튜버의 생방송을 4만여명의 지지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진행자는 위성정당 창당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배신자’라고 한참을 성토하더니 그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시청자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응징하겠다고 지령에 화답했다. 배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의원들은 이날 이후 약속이나 한 듯 위성정당 문제에 입을 닫았다.
지난해 7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한 방송에 출연해 재보궐선거 후보 공천을 두고 “공당이 문서로 규정으로까지 약속을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게 맞다”며 무공천을 주장했다. 이날 민주당 지지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 지사의 휴대폰번호와 소셜미디어 계정 ‘좌표’가 찍혔다. 이 지사는 다음날 “저는 서울·부산 시장 무공천을 주장한 바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민주당의 대패로 끝난 재보궐선거 다음날, 이 당 초선의원들의 뒤늦은 반성문이 나왔다. 이날 오영환·이소영·장경태·장철민·전용기 의원은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지지자들은 즉각 이들을 ‘초선 5적’으로 명명하고 휴대폰번호 좌표를 공유했다.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에 응징당한 5인방은 하루 만에 전날의 사과를 철회하고 문자발신자들의 입맛에 맞춘 다른 버전의 사과문을 낭독했다.
문자수취인들의 태도가 말해주는 것은 발신인들을 탓하는 것만으로 이 신종 테러리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테러행위를 부추긴 것은 문자여론에 기민하게 반응해온 정치인들이다. 수취인들의 태세전환을 지켜본 문자발신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에게 문자폭탄은 도깨비방망이다. 휴대폰과 좌표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갈아엎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작 문자 한통으로 엄청난 효능감을 맛본 사람들은 다음번에는 더 끔찍한 말들을 문자에 태워 보내겠지.
그깟 문자 몇개가 만들어낸 효과는 대단했다. 민주당이 원칙을 배반하는 순간마다 극성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이 있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당리당략 추구를 요구했고, 당은 이를 기민하게 수용했다. 당내 소신파들을 변절자로 낙인찍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의원들은 스스로 입을 봉했다. 그렇게 당이 서서히 질식돼 가는 사이 ‘문자여론’을 등에 업은 극단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모두가 문자폭탄의 위협에 꼬리를 내렸던 것은 아니다. ‘조금박해’라고 불리는 이 당의 4인방은 민주당에서 가장 많은 문자폭탄을 받은 정치인들이다. 강성지지자들의 위협에 꿈쩍하지 않았던 그들은 당내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거나 질타를 받으며 당을 떠났다. 저 당을 지배하는 것은 문자발신자들이다.
과대대표된 소수의 노이즈에 휘둘리면 작고 귀여운 정당이 된다는 것이 아스팔트보수에 휘둘리다 쪼그라든 새누리당의 교훈이다. 두 당을 보면 ‘손님은 왕이다’라고 써붙이고, 진상손님들 입맛에 휘둘리다 망해버린 식당을 보는 것 같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
민주당의 대패로 끝난 재보궐선거 다음날, 이 당 초선의원들의 뒤늦은 반성문이 나왔다. 이날 오영환·이소영·장경태·장철민·전용기 의원은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지지자들은 즉각 이들을 ‘초선 5적’으로 명명하고 휴대폰번호 좌표를 공유했다.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에 응징당한 5인방은 하루 만에 전날의 사과를 철회하고 문자발신자들의 입맛에 맞춘 다른 버전의 사과문을 낭독했다.
문자수취인들의 태도가 말해주는 것은 발신인들을 탓하는 것만으로 이 신종 테러리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테러행위를 부추긴 것은 문자여론에 기민하게 반응해온 정치인들이다. 수취인들의 태세전환을 지켜본 문자발신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에게 문자폭탄은 도깨비방망이다. 휴대폰과 좌표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갈아엎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작 문자 한통으로 엄청난 효능감을 맛본 사람들은 다음번에는 더 끔찍한 말들을 문자에 태워 보내겠지.
그깟 문자 몇개가 만들어낸 효과는 대단했다. 민주당이 원칙을 배반하는 순간마다 극성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이 있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당리당략 추구를 요구했고, 당은 이를 기민하게 수용했다. 당내 소신파들을 변절자로 낙인찍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의원들은 스스로 입을 봉했다. 그렇게 당이 서서히 질식돼 가는 사이 ‘문자여론’을 등에 업은 극단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모두가 문자폭탄의 위협에 꼬리를 내렸던 것은 아니다. ‘조금박해’라고 불리는 이 당의 4인방은 민주당에서 가장 많은 문자폭탄을 받은 정치인들이다. 강성지지자들의 위협에 꿈쩍하지 않았던 그들은 당내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거나 질타를 받으며 당을 떠났다. 저 당을 지배하는 것은 문자발신자들이다.
과대대표된 소수의 노이즈에 휘둘리면 작고 귀여운 정당이 된다는 것이 아스팔트보수에 휘둘리다 쪼그라든 새누리당의 교훈이다. 두 당을 보면 ‘손님은 왕이다’라고 써붙이고, 진상손님들 입맛에 휘둘리다 망해버린 식당을 보는 것 같다.
정주식 직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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