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아물지 않는 천안함 상처

김강한 기자 2021. 4. 2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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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피격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 예비역 대령과 천안함 유족 등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천안함 피격사건 재조사 시도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천안함 46용사 유족회와 생존자 전우회,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20일 청와대·국방부 앞에서 천안함 사건 재조사 시도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최근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천안함 재조사를 결정했었기 때문이다. 생업을 내려놓고 자식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선 유족들을 보며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사건 다음 날인 2010년 3월 27일 밤 평택 해군 기지에서 가족 80여 명과 함께 성남함(1200t급 초계함)에 탑승했다. 현장을 직접 보고 싶다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해군이 마련한 군함이었다. 가족들은 다음 날 아침 사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못 자고 비좁은 승조원 침실에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이들은 침몰한 함미 내부에 에어포켓(공기주머니)이 남아 생존 장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만 붙들고 있었다.

3월 28일 오전 가족들은 성남함 갑판에서 폭침 현장을 흔적 없이 집어삼킨 백령도 해상을 향해 남편·아들·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수습기자 때였던 당시 군함에서 가족들과 함께 울었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다. 3월 29일 3000t급 구조함인 광양함이 현장에 투입됐다. 온종일 구조 작업을 펼쳤지만 생존자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광양함 갑판에서 한 가족이 말했다. “애들 다 죽었다는 거 알아. 아는데 이렇게 수색 작업이라도 해보지 않으면 애들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수색 이틀 째인 3월 30일 오전 구조대장이었던 김진황 해난구조대(SSU) 중령이 수색 결과를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함미 왼쪽 출입문을 찾으러 들어갔지만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워 실패했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가족들은 낙담했고 김 중령은 눈물을 훔쳤다. 이날 오후 수색 도중 UDT(해군특수전여단) 대원인 한주호 준위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현장 감독을 해야 하는 나이인데도 자청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변을 당했다. 나흘 뒤 가족들은 “더 이상 희생을 원치 않는다”며 대승적인 수색 중단을 요청했다.

이후 유족들은 46용사가 국가유공자(전몰군경)로 등록된 것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살았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 틈이 없었다. 2013년 천안함 좌초 의혹을 제기한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 때문에, 취임 후 2019년까지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오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 때문에 상처는 아물다 곪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최근 진상규명위의 천안함 재조사 결정으로 곪은 상처가 터졌다.

천안함은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고 두 동강 났다. 민·군합동조사단이 내린 결론으로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좌초설은 끝없이 고개를 들고 있고 일부 정치 세력은 천안함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나라를 지키다 전사했는데도 편히 눈감지 못하는 46용사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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