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비율 최악, 신용은 최고.. 한국 공기업 '숨은 빚' 역설

이기훈 기자 2021. 4. 2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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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 '국가 채무의 숨은 빚' 공기업 부채 보고서

지난해 한국석유공사는 설립 41년 만에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자산에서 부채를 빼면 남는 돈이 한 푼도 없을 정도로 재무 상태가 부실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석유공사는 지난해 9차례에 걸쳐 공사채(公社債·공사가 발행하는 채권)를 찍었다. 원화뿐만 아니라 미국 달러, 홍콩 달러, 스위스 프랑 등으로 모두 1조9000억원가량을 빌렸는데 발행 금리는 최고 2.5%, 최저 0.26%에 불과했다. 일반 기업이라면 존속도 불투명하겠지만, 국가가 암묵적으로 보증을 선다는 이유에서 싸게 빚을 낸 것이다.

이처럼 빚을 늘리는 게 쉬운 탓에 우리나라 공기업의 부채 규모가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기업은 재무 구조가 엉망이어도 쉽게 돈을 빌릴 수 있으니 수익성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고, 정부도 “공기업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정책 사업을 떠넘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공기업 부채 규모 사실상 OECD 1위

20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공기업 부채와 공사채 문제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기업 부채는 금융과 비(非)금융 부문 모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추정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7년 기준 우리나라 비금융 공기업의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3.5%인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초대형 국영 석유사가 있고 정부 순부채가 마이너스(-)인 노르웨이를 제외하고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국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OECD 평균(12.8%)의 두 배 수준이다. 2019년 기준으로도 관련 자료가 있는 주요 8국 중에서 1위다. 산업은행 같은 금융 공기업의 부채는 2019년 기준 GDP 62.7% 수준인 것으로 KDI는 추정했다. 주요 기축 통화국인 일본(47.7%), 캐나다(28.6%), 영국(18.7%)보다도 높다.

우리나라 정부는 늘 “주요국 대비 국가 채무가 낮은 편”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숨은 빚’인 공기업 부채는 주요국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기업 부채는 2019년 기준 일반정부 부채의 절반(48.8%)에 육박한다. 관련 자료가 있는 국가 중 2위인 멕시코(22.8%) 두 배 수준이다.

◇정부 암묵적 보증에 공기업 빚 눈덩이

우리나라 공기업은 재무 구조가 얼마나 건전한지, 돈을 얼마나 잘 버는지와 관계없이 최상 수준의 신용도를 인정받고 있다. 완전 자본잠식 상태인 한국석유공사도 마찬가지다. 이는 공기업이 빚을 못 갚으면 정부가 대신 나서 갚아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정부 지원 가능성을 빼고, 공기업 재무 상태만 평가하는 ‘독자신용등급’은 투기 등급인 공기업이 적지 않다.

물론 우리 정부가 명시적으로 ‘빚을 갚아주겠다’는 보증서를 끊어준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외면하기 쉽지 않다. 황순주 KDI 연구위원은 “공기업 파산 시 정부가 (부채 상환을) 부담하지 않으면 그 공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공기업의 신용등급이 일괄적으로 떨어지고 국가 신용등급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도덕적 해이’가 나타날 수 있다고 KDI는 지적했다. 공기업은 향후 정부가 구제해줄 것이라고 믿고 재무 건전성, 수익성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정부는 국채를 더 찍으려고 국회 심의를 받는 대신, 정책 사업을 공기업에 떠넘기고 낮은 금리로 빚을 내게끔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공식적인 국가 채무보다는 공기업 부채가 불어나기 쉽다는 얘기다.

KDI는 “공기업이 발행하는 공사채 채무를 국가보증채무에 공식 산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명시적인 국가 보증을 받으려면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국회 심의를 받도록 해서 정말 공기업 부채를 늘릴 필요가 있는지 등에 대해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국가가 공사채를 보증해주는 과정에서 해당 기업의 위험 수준을 평가해 보증료를 매겨야 한다고도 권고했다. 그래야 보증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공기업 스스로 재무 구조를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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