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시장이 반찬인 이유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1. 4. 2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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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맛(flavor)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보통 음식에 무엇이 들어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뇌가 어떻게 맛을 창조하는가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 고든 셰퍼드, 《Neurogastronomy(신경미식학)》에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다. 배가 고프면 아무리 멋진 풍경도 눈에 안 들어온다는 말이다. 며칠 전 학술지 ‘네이처’ 4월 8일자에 실린 한 논문을 읽다가 동물 실험에서 이 속담이 떠올랐다. 이 경우 멋진 풍경이 아니라 이성의 신호인 페로몬이라는 게 다르지만.

우리 한쪽에는 이성의 오줌(페로몬)을 묻힌 조각이, 반대쪽에는 사료(먹이) 냄새를 묻힌 조각이 있다. 여기에 생쥐를 넣고 5분 동안 움직인 경로를 기록해 각 조각 앞에서 코를 킁킁거린 시간을 비교하는 실험이다. 

24시간 굶겼다가 1시간 동안 먹이를 먹게 한 생쥐를 15분의 준비시간이 지난 뒤 우리에 넣자 페로몬 조각과 먹이 냄새 조각 앞에서 보낸 시간이 비슷했다. 반면 25시간 내내 굶은 생쥐를 넣자 페로몬 조각 앞에서 보낸 시간은 약간 짧았고 먹이 냄새 조각 앞에서 보낸 시간은 3배 이상 길었다. 배가 고플 땐 짝짓기에 대한 욕구도 식욕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말이다. 사실 굳이 이런 실험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예상 가능한 결과다.

‘네이처’ 같은 일급 학술지가 이런 뻔한 실험을 포함한 논문을 실어준 건 이게 본 실험을 위한 예비 실험이라서다. 미국 하버드의대 세포생물학과 스티븐 리벌레스 교수팀은 이 행동실험을 이용해 배가 고플 때 음식 냄새가 더 좋게 느껴지게 하는 신경 회로를 찾는 데 성공했다.

우리도 종종 경험하지만 배가 고프면 음식 냄새에 민감해질 뿐 아니라 냄새가 좋게 느껴진다. 맛(flavor)은 미각뿐 아니라 오감의 정보가 종합된 결과로 특히 후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냄새가 좋으면 간이 아주 이상하지 않은 한 음식이 맛있기 마련이다. 배가 많이 고플 때는 반찬이 김치 하나라도 꿀맛인 이유다.

가끔은 후회할 일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소 까르보나라(크림 파스타)가 느끼해 꺼리는 사람도 배가 많이 고플 때는 옆자리에서 풍기는 까르보나라의 걸쭉한 냄새에 끌려 평소 먹던 뽀모도르(토마토 파스타) 대신 주문한다. 처음에는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좋지만 허기가 가시자마자 느끼함이 확 올라와 다 먹지도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는다.

우리 한쪽에는 이성의 페로몬을 묻힌 조각이, 반대쪽에는 먹이 냄새를 묻힌 조각이 있다. 여기에 배부른 생쥐를 두고 5분간 이동 궤적(주둥이 위치)을 기록하면 양쪽에 머문 시간이 비슷하다(가운데). 반면 25시간 굶긴 생쥐를 두면 먹이 냄새 쪽에 머문 시간이 훨씬 길다(아래). 네이처 제공

배고픔과 물림의 시소

뇌에서 식욕을 조절하는 핵심 부위는 시상하부다. 음식을 먹지 못해 에너지가 떨어지면 그렐린 같은 식욕 촉진 호르몬 수치가 올라가며 시상하부의 배고픔(허기) 회로를 켠다. 반면 배불리 먹으면 렙틴 같은 식욕 억제 호르몬 수치가 올라가며 시상하부의 물림(포만) 회로를 켠다.

흥미롭게도 배고픔과 물림의 핵심 회로는 서로 얽혀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상하부의 궁상핵에는 배고픔 신호를 내보내는 AgRP뉴런(신경세포)과 물림 신호를 내보내는 POMC뉴런이 존재하는데, 이들의 상반된 신호가 시상하부 실방핵(PVH)에 있는 MC4R뉴런으로 전달된다. 

MC4R뉴런은 물림 신호를 전달한다. 배불리 먹으면 POMC뉴런이 켜지며 내놓은 신호전달물질 α-MSH가 MC4R뉴런 표면의 수용체(MC4R)에 달라붙어 뉴런을 자극해 식욕이 사라지고 에너지를 쓰는 쪽으로 대사가 조정된다. 반면 굶으면 AgRP뉴런이 켜지며 내놓은 신호전달물질 AgRP가 MC4R에 달라붙어 뉴런을 억제해 식욕이 생기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쪽으로 대사가 맞춰진다. 

시상하부 실방핵(PVH)에 있는 MC4R뉴런은 물림 신호를 전달해 음식을 그만 먹게 한다. 배가 부르면 렙틴 수치가 올라가며 POMC뉴런이 알파-MSH를 내놓아 MC4R뉴런을 자극한다. 반면 배가 고프면 렙틴 수치가 내려가며 AgRP뉴런이 AgRP를 분비해 MC4R뉴런을 억제해 식욕이 생기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쪽으로 대사가 맞춰진다. 한 수용체가 자극 신호와 억제 신호를 받아 뉴런의 활성이 조절되는 건 드문 현상으로, 몸 상태에 따른 실시간 식욕 조절이 생존에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이처의학 제공

음식 냄새 선호도에 시상 관여 

그렇다면 배고플 때 음식 냄새가 좋게 느껴지는 데도 AgRP뉴런이 관여할까. 리벌레스 교수팀은 앞에 소개한 행동실험으로 이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연구자들은 광유전학 기법으로 AgRP뉴런의 활성을 조절할 수 있는 생쥐를 만들었다. 뉴런에 빛을 쪼이지 않으면 생쥐들은 정상적인 행동을 보인다. 24시간 굶었다가 1시간 동안 먹이를 먹은 생쥐는 페로몬 조각과 먹이 냄새 조각 앞에서 보낸 시간이 비슷했다. 

그런데 뉴런에 빛을 쪼이자 먹이를 먹었음에도 25시간 내내 굶은 생쥐처럼 먹이 냄새 쪽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AgRP뉴런이 활성화돼 신호를 계속 보내는 한 배가 불러도 먹이 냄새가 좋게 느껴지고 물리지 않는 것이다. AgRP뉴런은 뇌의 여러 영역으로 가지(축삭)를 뻗쳐 배고픔 신호를 전달하는데, 시상하부 실방핵의 MC4R뉴런은 그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배고픔 신호가 어디에 닿아 음식 냄새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일까.
 
영역별로 AgRP뉴런 축삭 말단을 자극하면서 행동실험을 한 결과 예상대로 MC4R뉴런이 있는 시상하부 실방핵은 아니었다. 말단을 자극해 MC4R뉴런으로 신호가 가도 먹이를 먹고 난 뒤에는 먹이 냄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림 신호가 억제돼 실험이 끝난 뒤 먹이를 주면 배가 부름에도 또 먹었다.

다른 여러 부위에서 실험한 결과 시상의 실방핵(PVT)을 자극했을 때 먹이를 먹고 난 뒤에도 먹이 냄새를 여전히 좋아했다. 그 결과 실험이 끝난 뒤 먹이를 주면 배가 부름에도 또 먹었다. 시상은 뇌의 중심부에 존재하는 구조로, 후각을 제외한 감각 정보가 대뇌피질로 전달될 때 거쳐 가는 중계기지다. 후각 정보는 시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뇌의 후각피질로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상이 음식 냄새의 선호도에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한편 시상까지 뻗은 AgRP뉴런 축삭의 말단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은 AgRP가 아니라 신경펩타이드 Y(NPY)로 밝혀졌다. NPY가 다양한 경로로 식욕 촉진과 에너지 보존에 관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그 가운데 하나의 신경회로가 밝혀진 것이다.

식욕 억제 신호를 전달하는 MC4R뉴런의 수용체(MC4R)에 달라붙어 뉴런을 활성화하는 약물 세트멜라노타이드(SET)가 비만 치료제로 지난해 11월 미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았다. 최근 SET가 달라붙어 활성화된 MC4R가 G단백질과 결합한 상태의 구조가 밝혀졌다. 오른쪽은 SET가 달라붙은 영역의 클로즈업이다. 사이언스 제공

신개념 다이어트약 나와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류는 처음으로 대다수가 굶주림에서 벗어난 일상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 정적인 생활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개인차가 커서 누구는 고도비만을 걱정하는 반면 여전히 날씬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의 일부는 식욕 회로를 구성하는 유전자의 변이로 설명할 수 있다.

2019년 학술지 ‘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영국인 50만 명의 MC4R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61가지 변이형이 있고 그 활성에 따라 체질량지수(BMI)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림 신호에 민감한 MC4R 유전형인 사람은 BMI가 낮고 물림 신호에 둔감한 유전형인 사람은 BMI가 높았다. 

지난해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AgRP처럼 MC4R뉴런의 활성을 억제하는 물질(SHU9119)이 달라붙을 때 MC4R 단백질의 구조를 저온전자현미경으로 밝힌 논문이 실렸다. 그리고 지난주(4월 15일) ‘사이언스’ 사이트에 α-MSH처럼 활성을 촉진하는 물질(세트멜라노타이드)이 달라붙을 때 MC4R 단백질의 구조를 역시 저온전자현미경으로 규명한 논문이 공개됐다. 굶주림 신호 분자가 결합했을 때와 물림 신호 분자가 결합했을 때 MC4R의 구조가 전혀 다르게 바뀌면서 활성이 꺼지거나 켜질 것이라는 추측이 확인됐다.

MC4R에 달라붙어 뉴런의 물림 신호 활성을 켜는 물질 세트멜라노타이드(setmelanotide)는 지난해 11월 미 식품의약국(FDA)로부터 몇몇 유전적 요인으로 인한 비만에 대한 치료제로 승인을 받았다. POMC뉴런에서 α-MSH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거나 POMC 뉴런을 자극하는 식욕 억제 호르몬인 렙틴의 유전자가 고장나 MC4R뉴런이 꺼져 식욕 과잉으로 비만이 된 사람들이 대상이다. 췌장의 베타세포가 망가져 인슐린을 만들지 못하는 1형 당뇨병 환자가 외부 인슐린을 투여받아 혈당을 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굶는 다이어트 하지 말아야

늘씬한 체형을 타고 난 패션모델은 살을 더 빼려고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다 자칫 식욕부진증에 걸릴 수 있고 실제 적지 않은 모델들이 식욕부진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모델 이자벨 카로(사진)도 식욕부진증으로 고생하다 2010년 28세에 사망했다. 마른 모델을 선호하는 패션업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프랑스는 2017년부터 ‘마른 모델 퇴출법’을 시행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1995년 미국의 정신의학자 랜돌프 네스는 ‘20세기의 다윈’으로 불린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스와 함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라는 책을 써 진화의학(처음엔 다윈의학이라고 불렀다)이라는 분야를 열었다. 저자들은 진화의 관점에서 질병의 원인을 살펴보고 치료법을 모색했다. 예를 들어 발열이나 설사는 감염에 대한 인체의 방어 반응으로 증상이 웬만하면 그냥 두는 게 낫다는 식이다. 

2019년 네스는 전공인 정신의학에 초점을 맞춘 책 《Good reasons for bad feelings(부정적 감정이 드는 타당한 이유》을 냈고 지난해 《이기적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한글판이 나왔다. 네스는 책 12장 ‘원초적 식욕이 당신의 다이어트를 지배한다’에서 지나친 다이어트가 식욕 회로를 교란해 섭식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네스는 “질병이 생기는 핵심 요인은 항성성 조절 시스템의 고장”이라며 “요즘에는 체중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상당히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고 썼다.

예를 들어 내리 굶어 단기간에 살을 빼려는 시도를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폭식증에 걸려든다. 며칠 동안 배를 곯다 보면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순식간에 피자 한 판, 아이스크림 한 통을 먹어치운다. 네스는 “폭식은 호흡을 멈추려는 노력이 끝나고 나서 헉헉대며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자발적인(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굶는 다이어트는 음식 공급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신호로 작용해 음식이 있을 때 최대한 먹을 수 있게 포만감이 억제되는 것이다.

굶는 다이어트를 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식욕부진증(거식증)이 생길 수도 있다. 식욕부진증은 폭식증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로 치사율이 10%나 된다. 음식을 거부하다 굶어 죽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사자는 음식이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반면 굶주릴 때 오히려 기분이 좋다.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반복하다 식욕 회로가 뒤엉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음식 냄새에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식욕부진증은 주로 젊은 여성에게서 발병하지만 유전적 요인이 큰 질병이다. 일란성 쌍둥이 가운데 한 사람이 식욕부진증이면 다른 한 명도 발병할 위험성이 50~60%나 된다. 유방암이 30%, 우울증이 40%인 것에 비하면 놀랄만한 수치다. 2019년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에는 식욕부진증 관련 유전 자리 8곳을 밝힌 연구논문이 실렸다. 이 가운데는 강박증과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과 관련된 곳도 있었고 BMI와 지질 등 대사에 관여하는 곳도 있었다. 배고픔 신호전달물질인 ApRP 유전자의 변이도 알려졌다.

네스는 책에서 “몸의 시스템들은 굶주림에 대비해서 우리 몸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호하도록 진화했다”며 “그에 비하면 과체중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는 시스템들은 빈약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배고픔 회로가 물림 회로보다 우세해 먹을 게 널려 있는 “지금의 환경은 인류의 조절 메커니즘이 대처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편차가 있어 몇몇 사람들은 회로의 균형이 물림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고(예를 들어 AgRP가 수용체에 느슨하게 붙는 변이형이라 배고픔 신호가 약한 경우) 그 결과 입이 짧아 ‘의지와 관계없이’ 음식을 절제해 날씬한 몸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생존에 약간 불리할 수 있는 변이였지만 지금은 다들 부러워하는 이상형이다. 흥미롭게도 식욕부진증 진단을 받은 사람 다수가 어릴 때부터 BMI가 낮다. 날씬한 사람이 살을 더 빼려고 굶는 다이어트를 하다 식욕부진증에 걸린다는 말이다.  

네스는 “식욕부진증을 일으키는 유전적 변이는 비정상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만 문제를 일으키는 유전적 급변(quirk)”이라며 “자연환경 속에 존재하는 해롭지 않은 변이”라고 설명했다. 배가 고프고 주변에 음식이 있음에도 의식적으로 이를 무시하고 굶는 행동(자연에서는 있을 수 없는)이 반복되면서 섭식 회로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는 말이 떠오른다.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9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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