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미술평론가 명성 얻은 졸라, 30년 우정은 잃었다

기자 2021. 4. 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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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팔레트를 바라보는 소설가의 불편한 시선, 32×22㎝, 종이에 먹과 채색, 2021.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72) 파리와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

‘나는 고발한다’로 유명한 졸라

비평적 소설 ‘작품’을 통해

실패한 화가의 비참한 삶 묘사

소년시절 함께 공부한 폴 세잔

자신을 빗대 조롱했다며 분노

죽을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아

“모두가 싸구려 초상화나 그리는 환쟁이들뿐이야. 명성을 얻기 위해 무식한 대중에게 아부하는 바보들이거나 교활한 놈들뿐이지! 부르주아들의 뺨을 신나게 한번 갈겨 줄 녀석 하나 없으니!….

앵그르후에 자네도 알다시피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이 두 사람밖에 없어. 그 나머지는 모두 사기꾼들이야. 그렇지 않아? 들라크루아는 나이는 들었지만 위풍당당한 낭만파의 거장이야! 그는 그야말로 색채를 불타오르게 만든 마술사였어. 거기에 넘쳐흐르는 힘은 어떻고! 만약 그를 가만히 놓아뒀다면 파리의 벽 전부를 칠했을 거야. 그의 팔레트는 언제나 펄펄 끓었지. 나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환상일 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어. 그래도 할 수 없지! 파리 미술학교를 불태우기 위해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제는 다른 것이 필요해… 아! 그게 뭐냐고?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만약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아주 강한 사람이 되겠지. 그래 어쩌면 그 일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위대한 낭만주의 장식화가 들라크루아가 흔들리고 무너진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또 쿠르베의 검은색 그림들도 벌써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아틀리에의 갑갑함과 곰팡이의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어. 자네도 동감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태양인 것 같아. 실내가 아닌 자연광을 받고 있는 대기. 밝고 젊은 그림, 진짜 빛 속에서 움직이는 사물과 사람들이 필요할지도 몰라.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것이 우리가 그려야 할 그림일 거야. 우리 시대에 우리의 눈이 바라보고 만들어 내야 하는 그림은 그런 것이어야 할 거야.”

클로드의 목소리가 다시 꺼져 들어갔다. 그는 자기 앞에 처음으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미래를 표현할 어휘를 찾지 못해 말을 더듬었다.

에밀 졸라의 문제적 소설인 ‘작품’은 미술 평론과 문학 작품 사이에 있다. 어찌 보면 적나라하고 날카로운 현장의 미술 비평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적 구성과 기법으로 일관하고 있는 허구의 문학 작품이다. 그러나 읽다 보면 헷갈린다. 당대에 가장 헷갈린 사람이 하나 있었다. 폴 세잔이었다. 저자로부터 우송돼온 책을 받아들고 읽어내려가던 그는 분노로 부르르 떨었다. 비참한 말로로 끝나는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 바로 자신의 얘기라는 직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공개적으로 자신을 욕보인 야비한 미술 비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난 세잔은 어린 시절 이후 30여 년 인연을 이어오던 ‘작품’의 저자 에밀 졸라와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주고받던 편지도 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과연 작가는 ‘작품’에서 그의 막역한 화가 친구를 조롱하고 욕보이려 했던 것일까. 평정심을 가지고 작품을 찬찬히 뜯어 읽어보면 오히려 그 속에는 광기와 실의의 화가 클로드 랑티에를 향한 응원과 갈망 같은 것이 짚어진다.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그러나 당대 화단에서 도외시되던 어떤 힘의 기류 같은 것을 응시하면서 그 새로운 힘의 격랑 속에 서 있는 한 화가의 실패와 좌절을 보고서처럼 쓰고 있는 것이다.

‘파리 사람들의 조롱 속에 클로드의 그림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그는 몇몇 친구와 더불어 작품을 출품해 따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군중은 무지갯빛이 총망라된 알록달록한 그의 그림을 보고 아주 즐거워하며 그를 아마추어 수준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소설 속의 이 대목, 아마추어 수준의 그림이라는 바로 그 대목에 세잔은 아마 가장 크게 상처받고 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흔들리는 듯한 데생, 칠하다 만 듯한 색채, 서투른 듯 맞지 않는 형태와 불안한 구도의 그림들은 이미 당시에 그가 아마추어 화가라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고 그런 편견과 냉소 속에서 결국 파리 입성을 포기하고 낙향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그 영혼에 소금을 뿌리듯 자신이 떠나온 바로 그 도시 파리에서 작가로서 성공한 친구 에밀 졸라는 “누가 봐도 세잔”인 듯싶은 실패한 화가 얘기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서 보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밀 졸라는 왜 미술 비평, 그것도 리얼한 현장 비평에 가까운 이런 책을 썼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벨 에포크’를 구가하던 파리 예술계와 문단의 분위기에서라면 쉽게 이해된다. 문인이라면 시, 소설, 희곡 할 것 없이 문필가의 첫 관문을 미술 평론으로 열었던 것이다. 차라리 미술 평론에 손대지 않은 문인을 골라내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앙드레 지드, 마르셀 프루스트, 장 콕토 등 수많은 시인, 소설가가 미술 평론을 썼고 미술가들과 어울렸다. 미술가들 또한 문인들의 미술 평론에 민감했고 그들의 붓끝에 자신의 미술가로서의 성패를 걸기까지 할 정도였다.

세잔이 친구의 소설에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당시의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엑상프로방스에서 소년 시절 함께 공부했으나 파리로 간 후 세잔은 고전을 면치 못했던 데 반해 에밀 졸라는 예술 평론집 ‘나의 살롱’을 발표하는가 하면 루공·마카르 총서를 출간하며 소설가로서도 대성공을 거두는 등 그 영향력이 막강해진다.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면서 특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마네와 각별하게 지낸다. 40대 후반에는 아내인 가브리엘 알렉상드린을 두고 30세 연하의 가정부 잔 로즈로와 사랑에 빠져 딸까지 뒀음에도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저 유명한 드레퓌스 재판의 허위성을 폭로한 신문논설 ‘나는 고발한다’와 논설집 ‘드레퓌스 사건, 전진하는 진실’로 그는 프랑스 지성과 정의의 상징처럼 우뚝 서게 된다.

한 권의 소설적 비평 아니, 비평적 소설이 20세기 예술사에 일으킨 파란의 전말은 그래서 복선처럼 깔린 우정과 배신, 좌절과 성취, 실의와 욕망의 울림으로 소설 이상의 소설로 남게 된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졸라가 선물로 준 사과, 세잔 ‘多시점 그림’의 단초 제공說

■ 엑상프로방스의 두 친구

“나는 에밀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엾은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 마크 트웨인

이처럼 마크 트웨인이 열광적 찬사를 보낸 소설가 에밀 졸라는 소설가 외에도 신문기자, 논설위원, 예술평론가, 사회운동가 등의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그와 화가 폴 세잔은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눴는데 졸라가 선물로 줬다는 사과는 훗날 세잔의 다(多)시점 그림, 철학적인 그림의 단초를 열었다는 시각이 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먼저 파리로 상경한 에밀 졸라가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드날렸던 데 반해 세잔은 살롱에 연속 낙선하는 등 쓰디쓴 실패를 안고 귀향한다. 그런 그에게 마치 자신을 모델로 한 듯, 아마추어 운운하며 써내려간 소설 ‘작품’은 커다란 분노와 충격을 안겨주게 된다. 이 소설이 출간된 후 세간에서도 그 실패한 화가가 바로 세잔이라는 설이 퍼져나갔고 이후 다시는 둘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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