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걔네(롯데)" 도발에도 이유 있었네
[이코노미조선]
학술의 '눈'으로 관찰한 구단주 정용진
1년 넘게 이어지는 낯선 바이러스의 위협을 딛고 2021년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됐다. 올해는 창단 첫해를 맞은 SSG 랜더스, 20여 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치고 한국 리그에 합류한 추신수 등 야구팬을 설레게 하는 이슈가 많다. 그런데 개막 전후로 팬들의 이목을 확 사로잡은 존재는 SSG 랜더스도, 이 팀에 합류한 추신수도 아니었다. SSG 랜더스 ‘구단주’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었다.
평소에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사생활을 드러내고, 이마트 제품을 재치 있게 홍보하기로 유명한 정 부회장은 스포츠팀 구단주로서도 SNS를 십분 활용해 신생팀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그가 3월 30일 음성 기반 SNS ‘클럽하우스’에 등장해 "걔네(롯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를 쫓아와야 할 것"이라고 도발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구단주의 도발 덕일까. 신생팀 SSG 랜더스는 개막전에서 유통 라이벌 롯데 자이언츠를 물리쳤다.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듯 보여도 대외적으로 정 부회장이 뱉는 말과 행동의 대부분은 치밀한 전략을 깔고 있다. 학계의 브랜드 마케팅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말이다. 정 부회장의 스포츠 구단 인수는 어떤 효과를 거둘까. 본업인 유통 사업과 취미이자 마케팅 도구인 SNS는 스포츠팀과 만나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이코노미조선’이 구단주 정용진의 행보를 학술적 관점에서 관찰했다.
◇1│"스폰서 제품? 무조건 사"
심리학자들은 스포츠팬은 응원하는 팀의 승리에서 ‘대리 성취(vicarious achievement)’를 느낀다고 말한다. ‘설득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로버트 치알디니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교수는 스포츠팬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대리 성취 현상을 ‘후광반사효과(BIRGing·Basking in Reflected Glory)’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자신을 팀에 투영한 상태에서 응원하기 때문에, 팀이 경기에서 승리하면 ‘우리가 이겼다’라고 외치며 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응원하는 팀을 향한 충성도(team loyalty)를 보이거나 자신과 팀을 동일시(team identification)하는 가족·친구를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만난다. 팀 충성도와 팀 동일시는 스포츠 마케팅 분야의 단골 연구 주제다. 송홍락 인천대 체육학부 교수팀은 프로야구팬의 팀 동일시와 팀 충성도가 모기업 제품 구매 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검증하기 위해 삼성 라이온즈와 LG 트윈스의 팬 27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두 팀 모두 모기업이 전자 기업이다.
조사 결과 연구진은 프로야구팬의 팀 동일시가 팀 충성도에 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팀 충성도는 모기업 제품 구매 의도에도 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팀 동일시와 모기업 제품 구매 의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해 삼성 팬은 삼성 가전을 선호하고 LG 팬은 LG 가전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정용진 부회장 입장에서는 SSG 랜더스 팬덤을 견고하게 다져야 신세계와 이마트의 충성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2│"야구 하면 유통 기업이지"
스포츠팀을 후원하는 모든 기업이 원하는 만큼의 마케팅 효과를 얻는 건 아니다. 현용진 카이스트(KAIST) 경영공학부 교수팀의 연구를 살펴보자. 연구진은 기업이 스포츠 스폰서십을 통해 스포츠 이벤트에서 기업 브랜드로의 ‘이미지 전이(image transfer)’ 현상을 누릴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대학생 30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이 연구 결과에서 주목할 부분은 스포츠 이벤트와 스폰서 브랜드 사이에 이미지 유사성이나 기능적 유사성이 있을 때 이미지 전이 효과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또 스포츠 이벤트와 유사성이 있는 브랜드가 후원할 경우 소비자의 태도와 구매 의도가 향상됐다. 현 교수는 "기업은 스폰서십 목표와 브랜드 이미지에 부합하는 스포츠 이벤트를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정 부회장은 시작부터 롯데와 유통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 위해 ‘걔네’라는 도전적 표현까지 썼다. 잡음은 나왔지만, 정 부회장은 유통 공룡 롯데가 오랜 시간 쌓아온 프로야구단 이미지를 같은 유통 업계 경쟁자인 신세계에 자연스레 입히는 데 성공했다. 즉 ‘유통-롯데-야구’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유사성을 신세계에도 단시간에 적용한 것이다.
◇3│라이벌 시청률도 올라간다
4월 2일 SNS ‘클럽하우스’에 다시 나타난 정 부회장은 롯데를 향한 자신의 3일 전 도발이 실은 "상대방을 자극해 야구판을 키우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롯데는 우리의 30년 동반자다. 롯데 덕분에 우리가 크고, 롯데도 우리 덕분에 컸다"라고 했다.
학계 연구 결과를 보면 정 부회장의 설명은 사실이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용어가 있다. 남의 불행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다카하시 히데히코 일본 교토대 의학대학원 교수팀은 실험 참가자에게 가상의 시나리오를 읽도록 한 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그들의 뇌파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강한 질투를 느끼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인간의 뇌는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라이벌 자극이 야구판 확대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각자 자기가 응원하는 팀 경기만 챙기면서 라이벌 팀을 배척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어서다. 그러나 샤덴프로이데가 라이벌 팀 경기 관람 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본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팀의 연구 결과는 예상을 벗어난다.
연구진이 국내 프로 스포츠팬 249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샤덴프로이데는 스포츠팬이 라이벌 팀의 경기까지 관람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악의적 감정으로 알려진 샤덴프로이데가 스포츠 활성화에는 되레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며 "라이벌 구도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으로 스포츠 경기 관람 활성화를 유도할 수 있다"라고 했다.
◇4│정용진이 곧 브랜드
마케팅의 거장 필립 코틀러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저서 ‘스포츠 브랜드 마케팅’에서 "프로 스포츠 구단주를 브랜딩하는 것은 구단주의 대중적인 가시성을 높여주고, 가끔 팬과 구단주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풀어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라고 했다. 코틀러 교수는 억만장자 기업가이자 미국 프로농구(NBA) 댈러스 매버릭스의 구단주인 마크 큐반을 예로 들었다. 큐반은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며 구단 방침을 공개하고 팬과 끊임없이 소통하기로 유명하다.
정 부회장은 4월 7일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과 함께 ‘케이크 선물 받음’이라는 글을 남겼다. 롯데 자이언츠와 개막전에서 승리한 뒤 누군가로부터 축하 케이크를 받은 것이다. 수백 명의 SSG 랜더스 팬이 사진 아래 댓글을 달았다. 정 부회장은 일부 댓글에는 직접 답변을 적으며 팬과 소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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