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로 긴 창'이 만든 혁신[임형남·노은주의 혁신을 짓다]

2021. 4.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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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가로로 긴 ‘빌라 사부아’를 지어 현대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발명품이 많이 있다. 스마트폰, 자동차, 비행기 등이 현대를 대표하는 발명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 외에도 새로운 시대의 마중물 역할을 했던 중요한 발명품이 무척 많이 있다.

재작년 여름 4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에 갇혀 허덕이던 어느 날, 구명보트같이 몸을 의지하던 에어컨이 덜컥 고장 나 버렸다. 다급하게 서비스센터에 연락하니 수리 신청이 폭주하여 일주일 후에나 방문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무인도에 갇혀 구조선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일주일을 버텼다. 다행히 수리가 가능한 고장이어서 점령군처럼 집에서 버티고 있던 더위를 몰아낼 수 있었다. 에어컨을 켜자 비로소 더위에 쫓겨 나갔던 이성도 돌아왔고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컨은 윌리스 캐리어라는 미국의 발명가가 1902년에 발명한 것이다. 우리에겐 에어컨 제품명으로 익숙한 캐리어라는 사람 덕에 열사의 사막에도 도시가 만들어지고 점점 혹독해지는 여름 더위에도 사람들은 이성을 잃지 않고 살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다. 엘리샤 오티스. 역시 ‘오티스’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엘리베이터이다. 오티스는 19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미국의 발명가인데,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서 수직이동기구인 엘리베이터를 발명했다. 그때가 1851년이었는데 몇 번의 실패 뒤에 1854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안전장치가 부착된 엘리베이터를 선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 회사를 만들어 개발하고 보급했다.

1871년 대화재를 겪은 뒤 마천루 도시로 재탄생한 미국 시카고의 모습
1871년 엄청난 화재로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던 시카고에서는 대대적인 재건 사업이 벌어진다. 서양의 건축은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리는 조적 구조라 건물을 높이 짓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개발된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철골 구조는 기둥과 기둥을 엮는 보로 건물의 뼈대를 삼기 때문에 한결 가볍고 넓은 실내공간을 만들며 여러 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물의 층수가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편리한 수직 이동수단이 필요했고, 엘리베이터는 그때 마침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시카고에 경쟁적으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게 되고, 현대도시의 상징과 같은 마천루들이 도시를 가득 메우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엘리샤 오티스는 그런 성공을 보지도 못한 채 1861년 빚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초반은 마치 땅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용암이 마침내 세상으로 터져 나오듯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루어낸 시기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봉건영주 대신 자본가들이 사회를 이끄는 계층이 되었고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충격적인 아포리즘을 남긴 니체로부터 시작해서 ‘자본론’을 통해 전복적인 사고를 전파한 마르크스 등이 나왔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아프게 기록했던 카프카, 우주와 시간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던 아인슈타인 등 혁명적인 생각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세상은 차곡차곡 크게 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건축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근대를 거쳐 현대건축으로 변하는 시기이며 사고의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미국의 고층건축물을 선도했던 일군의 건축가를 ‘시카고학파’로 부르는데, 유럽에서 현대건축의 문을 연 대표적인 인물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이다. ‘가로로 긴 창,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필로티, 옥상 정원, 자유롭게 벽을 구획할 수 있는 평면구성,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는 외관.’ 이것이 현대건축의 문을 열고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배해온 다섯 가지 원칙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빌라 사부아(Villa Savoye)’라는 집을 짓는다. 푸른 잔디밭 위에 하얀 기선처럼 떠 있는 이 건물은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건축가들이 마치 순례하듯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조적 구조는 일단 벽이 두꺼워야 했고 창을 크게 낼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철근의 인장력과 콘크리트의 압축력을 결합한 구조나 아예 철골로 기둥을 세우고 연결하는 새로운 구조의 발견으로, 벽은 집을 지탱하는 역할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 덕에 건축은 자유롭게 표정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가로로 긴 창을 만들거나 심지어 전체를 다 유리로 덮을 수도 있게 되었다. 빌라 사부아는 마치 현대건축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언서와도 같다.

‘가로로 긴 창.’ 지금은 아주 평범한, 동네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창문이다. 그 창이 만들어지기까지, 현대건축은 무척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실험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후 초고층이나 비정형의 기이한 형태, 화려한 외관으로 장식된 건축물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 어떤 것이 20세기에 이루어낸 혁신을 넘어설 새로운 징후가 될지 궁금하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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