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39] 귀족 교양수업이 해외투어 시초.. 여행은 병 고치는 약이었다
코로나19의 발병으로 세상이 얼어붙었다.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던 관광객 인파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현대 세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여행의 보편화일 터인데, 인류는 돌연 먼 옛날로 돌아간 셈이다.
지난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갔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조사 결과를 보면 80%의 사람은 자신의 도(départment)를 떠난 적이 없고, 60%의 사람은 태어난 면(commune)에 머물고 있다. 결혼도 대개 고향 사람과 한다. 피레네 산지의 생장피에드포르(Saint-Jean-Pied-de-Port) 마을에는 여성이 57명인데 4명 빼고는 모두 10㎞ 이내에서 신랑을 찾았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지라 할 수 있는 도르도뉴 지방의 경우 거의 모든 주민은 자전거가 나오기 전에는 15마일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여행은 극소수 사람에게나 가능한 특권이었다. 17~18세기에 상류층 자제들이 교양을 쌓으려는 목적으로 정해진 코스를 다녀오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 유럽 대륙 순회 여행)가 대표적이다. 여행객을 가리키는 tourist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특히 영국 귀족 자제들은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 등지를 찾아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문화를 직접 경험하며 식견을 넓혔다.
일반 여행객도 조금씩 늘었는데, 이 또한 영국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대개 건강을 위해서다. 처음에는 주로 우울증 치료에 좋다는 이유를 댔지만, 일반적인 병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여행을 권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여행은 거의 만병통치의 치료술로 여겼다. 당시의 의학적인 설명에 따르면 질병은 나쁜 물과 공기가 원인이다. 물과 공기가 오랫동안 정체 상태로 있으면 부패하여 장기(瘴氣, miasma,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나오는 나쁜 기운)를 발산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병은 공기가 바뀌면 나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건강을 되찾는다. 게다가 이동 중에 마차의 요동으로 몸이 흔들리고 떨리면 신체 조직이 강하게 단련되어 건강에 좋다는 그럴듯한 설명도 덧붙였다.
장기 이론이 쇠퇴하고 19세기 후반에 파스퇴르의 세균 이론이 나온 후에도 공기가 바뀌면 몸에 좋다는 이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파스퇴르 자신이 고도가 높아지면 세균이 약해진다고 주장했다. 해발 1700m 이상 올라가면 세균 군체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산지 휴양소, 더불어 온천 휴양소와 해변 휴양소가 늘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행의 즐거움 자체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꼭 건강 목적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산속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일이 늘었다.
여행객의 증가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관광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상층 인사들은 관광객이 너무 늘어 풍경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1830년대에 조르주 상드는 관광객 인파가 이 시대의 골칫거리이며, 세상의 모든 풍경을 망쳐놓고 명상적인 산책의 즐거움을 방해한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19세기 중엽에 관광 열차(Excursion train, trains de plaisir)가 나오고 대도시 교외의 피크닉 인파도 크게 늘었다. ‘관광 산업’이라는 용어가 1860년대에 등장했다. 철도역과 호텔 같은 관광 인프라가 증가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자연이 더 이상 옛날처럼 순수하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나친 관광이 자연의 본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것을 막자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1907년 프랑스에서 결성된 엘리트 여행자들 모임인 프랑스 여행 클럽(Touring Club de France)은 자연·문화 파괴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강연을 했다. 1909년에는 파리에서 최초로 경관 보호를 위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국립공원이나 보호 구역 설정으로 귀결되었다. 미국에서는 일찍이 1872년에 옐로스톤이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곧이어 유럽에서도 국가 혹은 지방 차원에서 보호 구역이 설정되기 시작했다. 자연을 보호하며 자연을 즐기는 방식으로 각광받은 것이 캠핑이다. 1901년 런던에서 처음 캠핑 클럽이 형성되었다. 이 클럽에 참여하는 엘리트 인사들은 돈을 아끼려는 목적이 아니라 넘쳐 나는 인파를 피해 오붓하게 자연을 즐긴다는 목적으로 캠핑을 선호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관광이 극적으로 증가한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다. 유명 관광지는 몸살을 앓았다. 소위 ‘관광 1세대’는 떠들썩하게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인들은 빠른 속도로 와서 사진 찍고 다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어서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등장했다. 이들은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한 줄로 질서정연하게, 남에게 폐 안 끼치며, 효율적으로 움직였는데, 루브르박물관 관람에 고작 한 시간만 할애한다는 소식에 파리지앵들이 기겁했다. 다음에 한국인 배낭여행객들이 체력을 앞세워 ‘유럽 15국 돌파’ 하는 식으로 뛰어다녔고, 그다음에 중국 관광객들의 인해전술이 세상을 평정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머리통을 뒤에서 지그시 밀쳐버리고 사진을 찍던 중국인 아주머니의 억센 손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많은 관광객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흉측하게 만든다는 반성으로 2018년 플뤼그스캄(Flygskam, 스웨덴어로 ‘비행기 여행의 수치’라는 뜻)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휴가 여행의 증가 그리고 항공 산업의 발전 덕분에 매년 관광객 수억 명이 수천㎞나 비행기로 이동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런 행위가 세계의 자연을 망치고 사람들의 삶을 어지럽힌다. 어떻게든 이 인간 메뚜기 떼를 줄이면 좋겠지만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걸 인위적으로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런데 2020년 팬데믹이 돌연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비행기 여행객 수가 95%나 줄었다. 베네치아의 운하 물이 맑아졌고, 뿌연 공기 속에 가려져 있던 히말라야산이 다시 보이고, 아이슬란드 하천에 물고기가 늘었다고 한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도 좋은 일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인 모양이다.
팬데믹이 지나가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직은 예상할 수 없다. 기다렸다는 듯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날지, 혹은 일부 전문가가 예견하듯 당분간 관광 산업의 불황이 이어질지 누구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차분하게 지내야 하는 이때, 앞으로 다시 여행이 자유롭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자연과 문화에 덜 해로운 방식의 여행이 어떠해야 하는지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여행의 괴로움>
여행이 늘 즐거운 건 아니다. 18~19세기에 프랑스 여행을 하던 영국인들은 프랑스 숙소의 위생 수준에 충격받았다. 벽에는 새카만 더께가 앉아 있고, 부엌에서는 개가 동물의 내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리옹 근처 여관에서 괄괄한 성격의 한 여행자는 조금 전에 개에게 먹이를 주던 그릇에 밥을 내오자 여직원의 머리 위에 쏟아버렸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에 이 48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입에 안 맞는 음식도 괴로운 일이다. 그날 구운 부드러운 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툴루즈 지방에서처럼 일주일 치 빵을 한 번에 굽는 것은 약과다. 알프스 산지에서는 1년 치, 심지어는 2~3년 치를 굽고는 훈제하거나 햇볕에 말렸다. 돌처럼 단단한 이 빵은 운반과 보존에는 좋지만, 먹기 위해서는 망치로 깨서 5번 삶아야 한다. 주민들은 쐐기풀(nettle) 수프와 함께 매일 먹지만, 많은 관광객은 시골 빵을 먹는 생각에 몸서리치며 자기 비스킷을 가지고 갔다. 피레네 지방의 곰 고기 스테이크 같은 별미 음식도 있으나, 부르고뉴의 여우 고기, 모르방 지방의 다람쥐 고기, 알프스 지방의 마멋(다람쥣과 동물) 고기는 괴이한 냄새와 맛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travel(여행)의 어원은 travail인데, 노동이나 힘든 고역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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