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기초학력을 부탁해
[경향신문]
“직업을 갖는 건 허무한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인 현철이(14·가명)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었다. 미래에는 로봇이 모든 일을 할 텐데 직업을 갖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얘기였다. 그러더니 “저는 로봇이 될 거예요”라고 했다.
‘기초학력도 인권이다’ 기획기사를 준비하며 만난 현철이는 생각(?)보다 학습능력이 괜찮았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곱셈과 나눗셈과 같은 기초연산은 잘 못했지만 일차방정식은 제법 풀었다. 말을 버벅거리기는 했으나 불러주는 영어 단어도 곧잘 받아적었다.
그러나 현철이를 만나보고서야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에게는 학습 지도보다 정서적 치유와 심리 지원이 우선이라던 교육 전문가들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커터칼을 들고 다녔다는 현철이는 이제 고모와 할머니가 말다툼을 하면 중재 역할을 할 정도로 바뀌었다. 학교생활이 재밌냐고 물으니 “재미없진 않은데 재미는 없다”고 알 듯 모를 듯하게 말하지만,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라고 했다.
아이가 변하기 시작한 지는 몇 달이 안 됐다. 곁에서 자신을 믿고 돌봐주는 누군가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술과 도박에 빠진 부모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려온 아이는 학교에서 매일 남아 보충수업을 받기도 했다.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고 과제가 많았다고만 기억한다.
지금은 고모와 살며 학교가 끝나면 동네 공부방에서 일대일 수업을 받는다. 고모와 공부방 선생님 모두 현철이가 이해하지 못하면 몇 시간이고 다시 설명하고, 방식을 바꿔 다시 가르친다. 심리치료기관도 다니고 있다. 형식적인 대화 몇 마디로 그쳤던 예전 상담센터와 달리 체스와 같은 놀이치료를 하는 곳이다.
현철이는 운이 좋은 경우다. 경제적 부담에도 현철이를 맡겠다고 마음먹은 고모가 있었으며, 어떤 인연인지 현철이를 살갑게 챙겨주는 동네 공부방 선생님을 만났다. 그냥 한번 가본 심리상담센터가 이전 상담센터와는 다르게 현철이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감정을 공감해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현철이처럼 운이 좋을 수는 없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교육계 안팎에서 기초학력 부진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교육부가 내놓은 대책은 대부분 학습능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방안에 불과하다. 기초학력 부진이 훗날 한 아이의 성장과 우리 사회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현철이 사례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기초학력 지원 정책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를 파악하고 장애 요인부터 해결해줘야 하는 것이다. 기초학력 부진은 단순히 공부를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게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학습능력을 뜻한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접근해야 한다.
혹여나 현철이를 다음에 만났을 때는 장래희망이 로봇이 아닌 로봇을 만드는 사람이기를 기대해본다. 현철이의 앞날을 응원한다.
이성희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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